공포의 인플레…'세계 6위 부국' 영국 아이들마저 굶긴다

입력
2023.01.26 20:30
구급대원, 교사도 무료 음식 찾아 푸드뱅크로
"돈 없어 식사 걸렀다"는 영국인 10명 중 1명

'파스타와 콩 통조림, 비스킷···.'

영국 런던에 사는 간호사 앨리시아 마타노(46)는 누가 볼세라 조용히 장바구니에 식재료를 주워 담았다. 식료품을 무료 배급하는 푸드뱅크를 처음 찾은 날이었다. 요즘 그는 열심히 일해도 먹을 것을 살 돈이 충분치 않다. 몇 달째 12세 딸의 학교 급식비도 못 냈다.

다른 영국인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지난달 해크니 푸드뱅크에서 끼니를 때운 어린이는 647명. 전년(330명)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점심으로 과자 한 봉지… 굶주리는 아이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6번째로 부유한 나라, 영국의 아이들이 배를 곯고 있다. 특히 경제활동을 하는 노동자층이 자녀들을 충분히 먹이지 못한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라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무시무시한 인플레이션 탓이다. 임금 상승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물가가 크게 뛰었다. 지난해 10월 영국의 물가상승률은 41년래 최고치를 찍었다. 전년 대비 10% 이상 오른 소비자물가는 내려올 줄 모른다. 치솟은 에너지 요금은 두 자릿수 물가 상승의 주범이다. 슈퍼마켓에서 파트타임 계산원으로 일하는 샤론 그랜트는 "난방비를 내고 나면 음식을 살 돈이 없다"며 "15세 쌍둥이 형제와 11세 딸에게 저녁으로 시리얼을 먹이거나 때로는 굶긴다"고 토로했다.

'아동 빈곤'의 징후는 뚜렷하다. 런던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학교 10곳을 운영하는 크리스탈라 자밀은 "일부 아이들이 점심으로 과자 한 봉지를 가져오기 시작했는데, 심지어 푸드뱅크에서 받은 것"이라고 했다. 일부 지역에선 아이는 물론 부모까지 학교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토스트로 아침식사를 대신한다. 친구가 학교에 가져온 음식을 훔쳐 집으로 가져가거나 먹을 것이 없어 운동장에 숨어 있는 아이들도 있다고 학교급식 지원단체 '셰프 인 스쿨'은 전했다.



일해도 돈 없어 굶는다… 푸드뱅크 찾는 노동자들

여론조사기관 유고브에 따르면 영국인 10명 중 1명(11%)은 최근 한 달간 배가 고파도 돈이 없어 식사를 걸렀다. 코로나19 대유행 이전(5%) 대비 두 배 이상 뛴 수치다. 런던의 유치원 교사인 애슐린 코리는 "두 아들을 더 먹이기 위해 때때로 끼니를 거른다"고 했다.

저소득 노동자층일수록 타격이 크다. 이들은 푸드뱅크로 향한다. 영국 최대 푸드뱅크 운영기관인 트루셀트러스트는 "지난해 상반기 30만 명 이상이 처음 푸드뱅크를 찾았다"면서 "상반기 푸드뱅크를 이용한 이들 중 5분의 1의 가정에는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밝혔다. 런던 동부의 푸드뱅크에서 일하는 킹슬리 프레데릭은 "구급대원, 교사들이 푸드뱅크에 온다"며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고 반문했다.

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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