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 문제의 해법을 공식화하고 피해자 측과 일본 등 당사자와 막판 조율을 벌이고 있다. 이 사안에서 피해자 구제에 나서야 할 주체는 마땅히 가해자인 일본 피고기업이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가 앞장선 건 지난 정부에서 역대 최악으로 나빠진 한일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다.
문재인 정부는 일본 피고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 피해자 측이 피고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압류하고 현금화를 추진하면서 한일관계가 파탄지경에 이르도록 상황을 방치했다. 대선 후보 때부터 한일관계 악화를 문 정부의 대표적 실책의 하나로 비판해온 윤석열 대통령으로서는 외교분야 최우선 국정과제의 하나로 신속히 행동에 나선 셈이다.
물론 한일관계 정상화는 절실하다. 그걸 위해 정부가 강제징용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우려 또한 만만찮다. 무엇보다 한일관계 정상화라는 성과를 급하게 내기 위해, 훨씬 중요한 원칙과 국가 품격을 훼손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서울대 일본연구소장인 남기정 교수는 진작부터 현실적인 강제징용 문제 해법을 통한 한일관계 정상화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도, 해결과정에서 견지돼야 할 최소한의 원칙을 강조해온 논자다. 남 교수에게 급물살을 타고 있는 정부 해법에 대한 평가를 구했다.
-정부가 일제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 최근 ‘제3자 변제’를 기본 틀로 하는 해법을 공식화했다. 정부안을 어떻게 평가하나.
“현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여러 사람 입을 통해 대위변제안이 거론되면서 그런 쪽으로 가겠구나 했다. 그리고 최근 민관협의회에서 '중첩적 채무인수'라는 정부안으로 제시됐다.
이번 정부안을 지난 정부 국회 차원에서 나온 당시 ‘문희상안’과 비교하면, 문희상안은 그래도 일본 피고기업 등의 위자료·위로금 조성 참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반면, 이번 정부안은 그런 전제조차 없이 우리가 선제적으로 피해자들에게 ‘판결금’이라는 돈을 지급하고, 일본 측의 호응을 기다리자는 식인 것 같다. 문희상안만 해도 일본 측의 사실 인정과 사과 요구를 명시하지 않아 비판을 받았는데, 어찌 보면 이번 정부안은 문희상안보다도 더 후퇴한 내용이 된 것 같다.
그동안 정부 안팎에서 ‘패키지딜’이니 ‘그랜드바겐’이니 하는 말들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이번 안을 보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우리가 피해자 구제 먼저 다 해놓고 일본의 선의를 기대한다는 식이니, 그걸 어떻게 주고 받는 식의 협상 결과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마치 우리가 해답을 가지고 일본에 가서 채점을 받아 오는 방식으로 정부 간 조율이 진행되는 느낌마저 든다.”
-우리 정부가 정부안에서 ‘판결금’이라는 용어를 쓴 건 어색하지 않나.
“대법원 판결에 따라 어쨌든 피해자들에게 지급되는 돈이니 ‘판결금’이라고 해도 아주 틀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판결 취지로 보나, 국내 피해자들로서도 어떤 식의 피해 구제든 그건 일제의 식민지배에 수반된 일본 기업의 불법적 강제동원에 따른 피해에 대한 배상이고 위자료인 셈인데, 그 본질을 애써 판결금이라는 용어로 희석하려고 하는 것 같아 안쓰럽다.”
-본인도 전에 일본 측과 별도로 한국 정부의 위로금이나 배상 같은 게 필요하다는 말씀을 했다. 제3자 변제나 대위변제를 염두에 둔 건가.
“대위변제라기보다는 저는 우리 정부가 일제 때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한 정부라는 점을 중시한다면, 당시 불법적 외국의 지배를 허용함으로써 우리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한 임시정부의 배상책임도 계승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입장에서 일본 측과 별도로 우리 정부의 숙제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정부와 사회가 어떤 식으로든 구제에 나서는 건 맞다고 본다.
다만 이 문제 해법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우선 역사의 정의를 세우는 층위가 있고, 현실로서 정부 간 외교교섭의 층위가 있고, 사법부 판결 이행이라는 층위가 있다는 말씀이다. 역사의 정의를 세우는 건 ‘사실 인정’과 ‘사과’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사법적 정의는 2018년 대법원 판결이 존중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는 일본이 이를 고스란히 수용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수용할 경우, 당장 수많은 피해배상 문제가 새로 발생하고, 또 앞으로 북일관계라든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교적 층위에서 일본 정부의 우려를 고려하여 대법원 판결 외부에서 이를 훼손하지 않고, 앞으로 발생하게 될 많은 피해자들에 대해 선제적으로 우리 정부가 배상조치를 취함으로써 일본 측이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도록 하자는 얘기였다.
그 경우, 우리 정부와 사회의 선제적 조치에 맞춰 일본은 역사정의, 사법정의를 존중하는 동시적 조치를 이행해야 한다는 얘기이고, 납득할 만한 피고기업들의 사실 인정과 사과, 피해 구제에 대한 기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일본 정부는 되레 피고기업들에 빗장을 걸어놓고 움직이지 말라는 식이다 보니 해결이 어려워지고 있는 셈이다.”
-현실적으로 일제강점 피해 구제에 있어서 역사 정의, 사법 정의, 외교 현실 등 3개 층위의 최적 해법을 찾은 사례가 있나.
“그나마 가까운 사례로 중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일본 니시마츠건설 간 화해 사례를 들 수 있겠다. 피해자들은 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고, 2007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원고 패소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강력 항의하고 중국 여론이 비등하자 현지에서의 지속적 사업을 위해 니시마츠건설은 명확히 사과하고, ‘화해금’을 지급했다. 그밖에도 중국인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일본 가지마건설, 철강회사 니폰야킨공업, 미쓰비시광업 등이 유사한 화해를 이뤘다. 모두 사법적 판결 밖에서 사실 인정과 사과, 실질적 배상이 진행됐고, 일본 정부도 그런 식의 해결을 막지 않았다.”
-국내 피해자 측은 일본 피고기업의 사과와 배상이 보장되지 않는 해법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우리 국민 다수가 납득할 만한 일본의 ‘사죄와 기여’ 방안, 또는 원칙을 제안한다면.
“구체적인 건 우리 정부가 노력하는 만큼 일본 측이 고민해야 된다고 본다. 다만 우리 외교부 담당 국장은 “피고기업이 일본을 대표해서 강제동원에 대해 사과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라고 했는데, 우리 대법원 판결은 민사소송에 대한 판결로서, 피고기업이 일본을 대표해서 행동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피고기업으로서 원고들에 대한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라는 것인데 우리 정부가 일본 기업의 입장을 두둔하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구체적인 사실을 추상화시켜 논점을 바꾸는 논법이다.
현실적인 이유로 법적 배상의 이행까지는 어렵다고 해도 사실 인정과 이에 입각한 명확한 사죄 및 반성 표명이 필요하다. 특히 적어도 니시마츠건설 방식처럼, 형식적 화해를 위해서도 가해기업이 피해자들에게 직접 사과하고 기념비와 같은 방식으로 불변의 의지를 표명하는 게 최소한이 아닐까 한다. 백보 양보해서 게이단렌 같은 일본 기업단체를 통한 기여를 한다 해도, 가해기업이 피해자들을 직접 마주하는 성의는 보여야 할 것이다.”
-피고기업의 직접 사과 없이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에 대해 포괄적으로 사과 입장을 표명한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본 정부가 입장을 표명한다면 최소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수준일 것이다. 아마 그걸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해당 기업의 직접 사과 없이 그렇게 가는 건 피해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건 사과든 구제든, 가해기업한테 받겠다는 거였다. 그래서 민사소송으로 갔던 거고. 만약 일본 정부 입장 표명으로 넘어가려 한다면 적어도 2010년 ‘간 나오토 담화’ 정도는 돼야 한다고 본다. 한일병합 100년의 해에 일본 각의 결정을 통해 나온 간 나오토 담화는 처음으로 일제 식민지배의 강제성을 인정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런 입장에 입각해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 대표단은 ‘자기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강요된 노동(forced to work)’ ‘희생자(victim)’ 등의 문구와 단어를 써서 본인 의사에 반한 강제적 노역에 따른 피해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역사인식이 후퇴했다는 전후 70년의 '아베 담화'에서도 "역대 내각의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림 없는 것"이라고 명언했다. 그렇다면 식민지배의 강제성을 확인하는 것이 최소한의 출발점이라 생각한다.”
"'군대위안부 합의'는 과거사 문제를 '닫힌 해법'으로 정리한 실책"
-한일관계 개선에 대한 정부의 의지와 행보가 적극적이다. 배경과 목표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한미동맹 강화나 한미일 안보협력 복원이라는 큰 틀 아래에서 한일관계 개선이 모색되고 있다고 본다. 지난 정부 때 한일관계가 사실상 방치된 건 분명한 실책인 만큼, 그에 대한 비판과 반성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일관계는 늘 안보와 경제, 과거사 이렇게 세 가지 쟁점을 둘러싸고 전개돼 왔는데, 안보와 경제라는 두 쟁점을 만족시키면 과거사 문제가 후퇴하는 일종의 트릴레마 상태였다. 그런데 현 정부는 지난 정부가 안보라는 목표를 평화라고 하는 걸로 바꾸고 과거사를 중시하는 입장으로 나아가는 바람에, 이른바 안보와 경제에서 양국관계가 훼손됐다고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그걸 복원하는 쪽에 무게를 싣다 보니 과거사 문제는 결국 봉합하는 걸로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나치게 서두르면 2015년 군대위안부 합의 같은 실책이 되풀이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시 합의는 어떤 점에서 실책인가.
“일본이 군대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과와 반성을 표명하고, 일본 정부 예산으로 조치를 취하겠다고 한 것은 진전이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실책은 ‘최종적 불가역적’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이다. 과거사 문제는 ‘닫힌 해법’이 아닌 ‘열린 해법’으로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 왜냐면 과거사는 아직 완전히 드러나거나 규명된 게 결코 아니어서, 앞으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면 그에 대해 사실 인정과 사과와 반성, 책임지는 과정이 계속돼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에도 ‘불가역적’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우리 측이 용인한 건 ‘여기서 더 나쁜 해법은 나오지 않아야 한다’는 취지의 면이 없지 않은데, 거기에 ‘최종적’이란 말까지 들어가면서 ‘이것으로 위안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정리가 매듭지어졌다’는 식으로 해석될 여지를 주고 말았다. 이번에도 조급히 서두르면 위안부 합의 때와 같은 닫힌 해법이 되지 않을까 경고한 것이다.”
-우리로서도 매번 뒷걸음치는 일본에 ‘사과와 반성’을 되풀이 요구하는 건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를 훌훌 털고, 앞으로 우리가 잘해서 일본을 압도할 수 있는 방향으로 힘을 쏟는 게 낫지 않겠냐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국제사회는 결국 힘의 논리로 작동하는 걸 부정할 순 없다. 또 우리가 언젠가 일본을 압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책임을 끊임없이 거론하는 건 앞으로도 어떤 나라에 의해서든 일제 식의 야만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려는 문명적 노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일본을 압도할 수 있다고 해서 일본을 강점하거나 침탈해서도 안 되는 것 아닌가. 사실 문명에서 야만에 대한 견제를 포기한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지금 전 세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도 힘에 의한 침략에 반대하는 보편적 정의에 대한 인류 전체의 합의 아닌가. 한일 양국은 인류가 지향해야 할 기본적인 가치 때문에라도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분명히 정립해 나가야 한다. 일본도 사과와 반성을 거듭해오며 좋은 지점까지 진전해왔는데, 스스로 이룬 성과를 부정하는 모습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