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 업체에서 아웃소싱 업체에 사직서를 쓰라고 해서 썼고, 새로 근로계약서를 쓰라고 해 따랐습니다. 소속은 아웃소싱 업체지만 원청에서 근무했으니까요."
아웃소싱 업체 소속으로 원청 업체에 파견돼 2년간 근무한 A씨는 퇴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2년 내내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했지만 A씨가 근로계약을 맺은 아웃소싱 업체를 몇 달 단위로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계속 일하기 위해 원청에서 하라는 대로 업체를 이리저리 오간 것이었지만 장기근속 시 발생하는 정규직 전환과 퇴직금 지급을 피하기 위한 원청의 꼼수였다. 원청 상사의 갑질을 견디다 못해 일을 그만둔 A씨는 결국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회사를 나와야 했다.
24일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이 같은 A씨의 사연과 함께 지난해 12월 7~14일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응답자들은 '한국사회에서 원청의 갑질이 심각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87.6%가 '심각하다'고 답했다. '한국사회에서 하청 노동자가 받는 처우에 대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도 89.6%가 '정당하지 않다'고 했다. 정규직·비정규직을 막론하고 하청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이 열악하다는 데에 대다수가 동의한 것이다.
하청 노동자들은 원청의 갑작스러운 해고나 도급계약 종료 통보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기도 했다. 제철소 하청업체 노동자 B씨는 "제철소 내에서 공장을 운영하던 회사가 지난해 12월 31일자 '도급계약 종료'를 이유로 사업을 접었다"면서 "지역 고용노동청에 신고부터 해야 하나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임금 체불 위기도 잦다. 원청이 도급액을 주지 않거나 납품단가를 후려쳐 계약하면 하청업체는 노동자 임금부터 주지 않으려 들기 때문이다. 직장갑질119는 "임금 체불 피해를 입은 하청 노동자는 원·하청 상대 민사소송을 해야 하는데, 변호사 선임비도 없는 가난한 노동자에게는 꿈 같은 이야기"라고 했다. 또 A씨처럼 원청 직원으로부터 괴롭힘이나 성희롱을 당해도 같은 직장 소속이 아니라는 이유로 직장 내 괴롭힘·성희롱 금지법 적용이 불가하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직장갑질119는 하청 노동자의 근로조건에 원청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만큼 노동조합법상 사용자와 노동자의 개념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법원과 중앙노동위원회에서도 CJ대한통운 판결 등 하청 노동자에 대한 원청의 사용자 책임을 일부 인정하는 판결이 나오고 있다. 윤지영 직장갑질119 변호사는 "노동관계는 형식이 아니라 실질을 가지고 판단해야 하고, 고용 형태의 다변화 등 변화하는 현실까지 고려해야 한다"면서 법 개정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