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장에서 쇠 구조물이 내려온다. 100명의 참가자가 두 팔의 힘으로만 구조물에 매달리는 것이 미션. 바닥이 두 쪽으로 갈라지며 깊이를 알 수 없는 물 웅덩이가 드러난다. 버티지 못하면 빠진다는 단순한 룰 앞에 국가대표부터 보디빌더까지 한 ‘피지컬’ 한다는 참가자들이 이를 악문다. (넷플릭스 '피지컬:100')
#2. 격투기 선수 추성훈, 김동현, 정찬성과 최두호가 멘토로 나서 일반인 '파이터'들과 팀을 이룬다. 무에타이 경력자부터 학교폭력 피해를 딛고 운동한 '샌드백'(닉네임)까지 사연을 가진 일반인들이 격투기 선수로 나선다. 링에 오를 수 있는 선수는 단 16명. 그마저도 치열한 합숙 훈련을 거쳐야 한다. (SBS '순정 파이터')
'피지컬'을 전면에 내세운 예능 프로그램이 잇따르고 있다. 몸과 몸이 부딪치는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인 방식으로 승리자를 뽑는, '피지컬' 그 자체에 충실한 콘텐츠들이다. 수 싸움도, 편 가르기도 통하지 않는다.
24일 공개된 넷플릭스 '피지컬:100'은 예고편부터 "오징어 게임 실사판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른바 '근징어 게임'(근육과 오징어 게임을 합쳐서 만든 별명)이란 애칭도 얻었다. "우리는 성별, 나이, 인종의 구분 없이 가장 완벽한 피지컬을 탐구하기 위해 여러분을 이곳으로 초대했습니다." 기획 의도나 연출은 단순하다. 서사는 깔끔하게 생략된 대신 빠른 움직임이나 힘 등 각자의 '피지컬'을 무기로 퀘스트를 수행해야 한다. 맨몸의 생존 게임에서 성별, 직업, 배경 따위는 의미 없다. 룰 앞에서 모두가 평등할 뿐.
바로 이 지점이 매력 포인트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오로지 몸만 활용하는 서바이벌 방식은 대중에게 상대적으로 공정한 방식이라는 생각을 준다”면서 “(인맥, 학벌 등) 스펙을 따지는 불공정한 현실 세상과는 다르게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순정 파이터'에서 다루는 격투기의 결도 비슷하다. 연출을 맡은 안재철 PD는 “격투기는 정말 맨몸으로 하는 스포츠라 가장 공정하고 솔직한 스포츠로 불린다”고 설명했다. 다만, 격투기 자체가 과격한 요소를 품고 있다 보니 이 프로그램은 일반인 파이터들의 서사도 충실히 담았다. 욕설과 폭력 등 자극적 요소를 최대한 덜어야 하는 지상파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연출법이다. 격투기를 좋아하는 마니아층을 넘어 대중적인 관심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학교폭력 피해를 입은 뒤 강해지고 싶어 운동을 시작한 닉네임 ‘샌드백’의 사연은 유튜브에서 조회수 150만 뷰를 넘겼다. “약점을 스스로의 의지로 극복한 모습이 멋있다”는 응원이 잇따랐다. 안 PD는 "고정관념과 달리 파이터들이 오히려 더 바른생활을 하고 순수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피지컬 예능'은 축구 풋살 야구 등을 소재로 리얼한 승부를 펼치는 '스포츠 예능'에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 육체의 근력과 그 분투에 더욱 초점을 맞춘 셈. 하지만 피지컬 묘사가 리얼하면 리얼할수록 "지나치게 자극적이다"는 비판이 숙명처럼 따라다닌다. 자칫 폭력에 둔감해지거나 이를 미화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에서다.
피지컬 예능을 기획하는 제작진도 이를 염두에 두고 수위를 결정한다. 최근 시즌2까지 끝낸 유튜브 콘텐츠 '좀비트립:파이터를 찾아서' 시리즈는 일반인 싸움꾼, 이른바 '스트리트 파이터' 중 고수를 찾기 위해 격투기 선수들과 직접 결투를 벌이는 장면을 보여줬다. 일각에선 "폭력을 조장한다"는 우려도 나왔다.
이에 대해 좀비트립 제작진은 본보에 "출연하는 파이터들에 대해 제작진이 의도를 가지고 포장하면 혹여 폭력을 미화시킬까 싶어 경계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콘텐츠의 목적도 애초부터 "격투기라는 종목을 단순히 폭력적이고 무서운 것이 아닌, 룰이 있고 훈련을 통해 강한 자가 승리하는 스포츠라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데 방점을 뒀다고 한다. 제작진들은 시즌3 격의 프로그램에서 격투기의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겠다는 계획이다.
'피지컬 예능'에 대한 관심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넷플릭스는 일찌감치 여성들의 생존 전투 서바이벌 예능 '사이렌: 불의 섬'을 올해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 키워드는 '전투력'이다. 정덕현 평론가는 "피지컬을 앞세운 프로그램은 시각적 자극을 넘어 촉각적 자극까지 전달하는 느낌을 준다"면서 "특히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장에서 언어의 장벽을 깨는 장점이 있는 콘텐츠인 만큼 꾸준히 공급이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