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란 뚜껑 한가운데 간호사 얼굴이 그려진 초록색 철제캔을 어긋 돌려 열면 화한 멘톨향의 연두색 연고가 젤리처럼 가득하다. 한국인에게 친숙한 가정상비약 안티푸라민이 아흔 살이 됐다. 1933년 출시된 이 연고는 거의 모든 약품을 수입하던 시절, 유한양행 자체 의약품 1호로 세상에 나왔다. 용도는 항염증제이자 진통소염제이지만, '입술이 트면 입술에, 배가 아프면 배에' 바를 만큼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지는 국민연고다.
90년 된 유한양행의 대표 브랜드 안티푸라민이 '손흥민 파스'라는 별명을 얻으며 매출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20일 유한양행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안티푸라민 브랜드의 잠정 매출은 297억 원으로 2012년 79억 원에서 10년 만에 네 배 가까이 성장했다. 매출이 정체를 겪기 십상인 장수 브랜드가 노익장을 과시하는 건 대표 상품인 연고에 머무르지 않고 동전모양 파스와 뿌리는 파스, 겔 타입 등 다양한 신제품을 내놓으며 변신을 거듭하며 호응을 얻은 덕분이다. 11일 서울 동작구 유한양행 본사에서 만난 이창원 마케팅팀장은 100년을 바라보는 안티푸라민이 여전히 성장을 이어가는 비결로 "고객의 필요를 현장에서 찾았다"고 답했다.
유한양행이 회사의 유산인 안티푸라민 브랜드를 성장시킨 비결은 세 가지다. ①66년 동안 연고 타입 하나로 꾸준한 매출을 안기던 안티푸라민의 라인업을 넓혔다. 이 팀장은 "연고 타입 매출은 1990년대 들어 정체를 겪었다"며 "로션 타입과 다양한 파스를 만든 계기"라고 설명했다. 1999년 처음 로션 타입을 시도한 안티푸라민은 이후 통증 부위별 파스 시장이 형성되자 2010년엔 붙이는 파스를, 2012년엔 젊은 세대가 많이 찾는 스프레이 타입 '에어파스'를, 2015년엔 동전 모양 파스를 내놨다. 안티푸라민 파스의 등장에 시장 반응은 뜨거웠다. 2014년 안티푸라민 브랜드 매출은 108억 원을 돌파하며 블록버스터 의약품에 올랐다.
약국에서 '강력하고 빠른' 스프레이 파스를 찾는 고객이 늘자 지난해 11월엔 함량 높은 '쿨에어파스 파워'를 출시했고, 첫 물량 11만 개가 완판됐다. 영업사원으로 14년 동안 전국 약국을 뛴 이 팀장은 "최근 약국에서 함량 높은 에어파스가 잘 팔리길래 대항할 제품을 내놨다"며 "안티푸라민 브랜드에 친숙한 소비자들이 파스도 믿고 써줬고 효과가 좋으니 재구매율이 높다"고 설명했다.
②비용 높은 TV광고보다 약국에 '안티푸라민 손흥민 진열대'를 배치한 것도 진통소염제가 필요한 고객을 정확히 겨냥한 맞춤형 전략이다. 유한양행은 전국 약 1만4,000개 약국 중 7,000곳에 안티푸라민 진열대를 제공했다. "파스 찾는 소비자가 안티푸라민 브랜드를 눈으로 보고 선택하도록 접점을 마련했다"는 설명이다.
③안티푸라민의 매출뿐 아니라 브랜드 이미지까지 끌어올린 강력한 무기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손흥민 선수를 안티푸라민 광고 모델로 정한 것. 유한양행 관계자는 "2018년 처음 모델 선정 후 1년 동안 손 선수가 달리는 장면과 함께 유한양행과 안티푸라민이라는 브랜드만 노출하고 제품은 드러내지 않았다"며 "유한양행=안티푸라민=손흥민=국가대표로 이어지는 브랜딩이 목표였다"고 설명했다. 단지 신제품 하나의 매출을 올리는 게 아니라 세대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국민연고의 명맥을 잇겠다는 것. 2020년엔 안티푸라민 손흥민 에디션을 내놨다. 이 팀장은 "젊은 세대뿐 아니라 어르신들도 손흥민 파스라 부를 정도"라고 말했다.
안티푸라민은 90년 전 유한양행 창립자인 고(故) 유일한 박사의 부인 고(故) 호미리 여사가 국내에서 소아과를 운영하던 중 유 박사에게 제안해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안티푸라민이라는 브랜드명은 반대라는 뜻의 안티(anti)에 염증을 일으키다는 뜻의 인플레임(inflame)을 합쳐 발음하기 좋게 바꾼 것이다. 유 박사는 이 약이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지는 것을 경계해 1930년대 신문 광고에 "사용 전 의사와 상의하라"는 문구를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