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두 명의 출연진이 바이크를 타고 한적한 길을 따라 달리다가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텐트를 친다.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모닥불을 피워 '불멍' 하다가 다음 날 경치를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로 잠을 깨우는 그런 힐링 콘텐츠다. 자극적인 요소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여행하는 모습이 부러워 머리가 복잡하거나 쉬고 싶을 때 틀어놓고 멍하니 본다. 구독자가 그리 많지 않은 작은 채널인지라 시청자와 소통도 활발한데, 영상 속 풍경에 감탄하는 내용과 더불어 둘의 사랑을 응원하는 아주 클린하고 훈훈한 내용이 대다수다. 그런데 이 훈훈함에는 한 가지 반전이 있다. 사실 이 두 유튜버는 모두 남성이며 연인 사이도 아니다. 구독자들도 당연히 이 사실을 모르지 않으니 저런 댓글을 다는 건 일종의 장난이며 해당 유튜버도 별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웃어넘긴다. 여기서 진지한 건 오직 나뿐이다. 다만 나는 저 두 출연진의 모습이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뭐지?'라는 진지한 생각을 하고 있다.
"동성이기에 우정으로 넘겼던 사랑, 이성이기에 사랑으로 착각한 순간." 인터넷 커뮤니티에 많이 떠돌았던 말이다. 나 역시도 이성에게 느꼈던 좋은 우정의 감정을, 이성이기에 사랑으로 착각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동성이기에 우정으로 넘겼던 사랑은? 사실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철저히 이성애자로 태어나서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이성애 중심주의와 남성문화 속에서 자라며 동성과의 사랑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계보는 내가 더 어리고 귀여웠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생의 '귀염뽀짝한' 이한은 학교에 갈 때면 동네 친구들과 나란히 손을 잡고 걸었다. 특히 한 동네에 살던 동성 친구와 유달리 친해서 매번 손을 잡고 다녔는데, 어느 날 이 모습을 본 동네 어른들이 귀엽고 보기 좋다며 깔깔거렸던 순간을 기억한다. 어떤 악의도 담기지 않은 장난스러운 말이었지만, 은연중에 우리의 이러한 행동이 웃음거리가 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허나 인위적으로 관계에는 거리가 생겼다.
조금 더 나이 들고 나서부터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이런 암묵적인 룰을 눈치껏 체화했다. 특히 중학교에 올라가고 사춘기가 시작된 이후부터 남성 간 스킨십은 일종의 금기였다. 기껏해야 가벼운 어깨동무였고 최대의 스킨십은 몸통 박치기나 주먹다짐이 전부였다. 이런 분위기는 강산이 변해도 한참 변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강사로 다양한 학교에 다니면서 여자 학교나 남자 학교 모두 통념과 달리 엇비슷하게 시끄럽고 더러우며 유쾌한, 사람 사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한 가지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면, 여자 학교에는 서로 팔짱 끼고 손잡는 친구들이 더러 있지만, 남자 학교에서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남자의 적은 남자'라는 말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여성들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나누는 스킨십도 남성들 사이에서는 이토록 금기시되는 걸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오빠,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형'은 방송인 홍석천씨를 수식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보수적인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을 비틀어 표현하여 사회의 편견과 금기를 뛰어넘는 홍석천씨의 개그코드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 이는 유쾌하지만 결코 간단하거나 쉽지 않다. 이 웃음의 결정적인 포인트는 동성애자를 향한 사회적 통념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고 당당하게 주체로 나서는 홍석천씨의 삶의 맥락을 통해 만들어지기에, 아무나 함부로 쓸 수 없다. 문제는 이 개그가 아니라, 이 개그를 다큐로 받아들일 때 발생한다. 이를테면 이런 농담에 자신은 동성 친구가 고백하거나 덮칠까 봐 동성애자가 두렵고 싫다고 말하며 질색하는 경우, 분위기는 '짜게 식는다'. 일단 대체로 이 정도의 감수성과 문해력으로 누군가의 호감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상상하는 것부터 가당치 않다. 그 흔한 이성애자의 구애도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염려는 고이 잘 접어두고 자기 객관화에 조금 더 시간을 써야 하지 않을까. 다만 이런 농담이 통용되는 배경은 두고 이야기해볼 법하다. 홍석천씨가 주변 남성을 향해 '플러팅'할 때면 우락부락한 남성도, 나이와 사회적 지위가 있는 남성도 어색하고 낯설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인다.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데 기뻐하기는커녕 왜 이렇게 난처해하고 두려워할까? 비단 이런 경험이 생소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학교에서 남자 청소년이 토닥거릴 때면 '게이냐!'는 말이 곧잘 튀어나온다. 자신의 외모에 관심 갖거나 소심한 모습을 보일 때, 어쩌다 손등이 스치거나 심지어 친구에게 걱정 어린 안부를 물을 때조차도 고맙다는 말 대신 '게이냐'는 물음 아닌 물음이 불쑥 튀어나온다. 안 그래도 이성애 중심주의가 판치는 보수적인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문화는 서로 공명하여 남성들의 만연한 동성애 혐오로 나타난다. 한국리서치의 '2022 성소수자인식조사'에서 우리 사회의 성소수자 포용에 관한 질문으로 '우리 사회가 동성애를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애초 사회에 녹아들어 있는 존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유해하지만, 일단 차치하고 그 내용을 따져 들어가 보면, 우리 사회 18~29세 여성 청년의 64%는 '우리 사회가 동성애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응답했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응답은 18%였다. 반면, 또래 남성 청년은 '받아들여야 한다'가 43%,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가 32%였다. 같은 청년 세대임에도 차이가 두드러진다. '성소수자에 대한 개인의 감정'을 묻는 질문에서는 60세 이상을 제외하고는 모든 연령에서 남성이 또래 여성에 비해 더 높은 적대적 감정을 보였다. 단지 생물학적인 이유만으로 이 차이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남자답지 않음과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 심지어는 그저 사랑일 뿐인 어떤 사랑의 한 형태도 남성연대에서는 처벌의 대상이 되고, 그 위계질서에서 나락에 떨어지는 이유 아닌 이유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그 자체로 누군가를 소외, 폭력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리고 그 영향은 비단 일부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회에서 거의 모든 남성들은 자신이 그와 무관함을 증명하기 위해 스킨십이나 애정표현하는 것을 과장되게 싫어하도록 만들어진다. 그 안에서 어떤 남성들은 자신의 다양한 욕구와 사랑의 모습을 탐구할 겨를도 없이 성급히 자신을 이성애자로 간주하며 다른 상상력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렇게 거세된 감정이 타인을 향해 쉬이 뻗어 갈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남자들의 리얼한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회자되었던 한 장면이 있다. 영화배우 박정민이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눈빛 교환이나 별 안부 인사도 없이 그저 묵묵히 침묵 속에서 밥만 먹는다. 여성 패널들이 의아해하는 와중에 남성 패널들은 공감해 마지않고, 많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는 남성들의 간증이 쏟아졌다. 술 없이, 게임이나 스포츠 같은 매개 없이 단둘이 있을 때 어색함을 호소하는 남성들이 많다. 나는 이 감정적 교류 없음을 '리얼한 우정'으로 포장하고 싶지 않다. 어떤 남성들이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찾는 건, 고음이 불가해서가 아니다. 이토록 부재한 감정적 교류를 여성에게 위탁하고 찾는 빈약함이다.
남자들의 우정에 '사랑'의 이름을 붙인다고 모든 우정이 사랑이 되고 모든 사랑이 우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꾸준히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뭔데!"라고 외친다. 그것은 우정과 사랑이 하나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애써 분리하고자 하는 마음 한편에 성애에 대한 철저한 구분으로 타인을 배제하고 심지어 자신의 마음마저 속이는 일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가문 남자들의 우정에 감정적 교류와 돌봄이라는 단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기에 사랑만큼 멋진 말이 또 없다. 근황을 나누고 서로 염려하며 돌보고 따뜻한 체온을 나누는 그런 끈끈한 우정과 사랑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