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에 앉아 있던 학생은 교실에서 난데없이 물벼락을 맞았다. 생수병에 담긴 물을 뿌린 이는 똑같은 교복을 입은 다른 학생들이었다. 얼굴과 머리가 젖은 학생이 "악" 소리를 내자 또 다른 학생이 필통으로 그의 머리를 툭 치고 지나갔다.
최근 태국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학교 내 집단 괴롭힘 영상 속 모습이다. 현지 누리꾼들은 이 영상을 'Thai The Glory'란 문구를 달고 공유했다. 태국판 '더 글로리'란 뜻이다. 일간 마티촌 등 태국 언론에 따르면, 학교폭력을 다룬 송혜교 주연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영향으로 학폭에 대한 고발도 이뤄지고 있다. '태국 스타' 파왓 칫사왕디는 중학생 때 학폭 가해자였던 것이 폭로되자 SNS에 "평생 죄책감을 느끼고 살 것"이라고 사과문을 올렸다.
'더 글로리'가 태국의 학폭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면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넘어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방아쇠가 된 것이다. K콘텐츠의 파급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더 글로리'는 지난해 12월 30일 공개된 뒤 태국을 비롯해 일본, 멕시코, 프랑스, 이집트, 호주 등 60여 개국에서 넷플릭스 주간 차트 톱10에 올랐다.
'더 글로리'가 유통된 수많은 나라 중에 태국에서 학폭이 '미투 운동'처럼 번지는 배경은 무엇일까. "학폭을 그저 그 나이 때 담배나 술에 호기심을 느끼고 해보는 애들일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태국 일간 타이랏)에 대한 청년 세대의 반발이 크게 작용했다. 시무앙 케와린 한국외대 태국어과 교수는 "학폭이 그간 심각한 사회 문제로 공론화되지 않았고 '더 글로리'가 학폭 피해자들에게 세상에 말할 용기를 불러일으키면서 SNS에 'Thai The Glory'란 해시태그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종교(불교)와 왕실을 중심으로 굴러가는 태국은 왕실모독금지법이 엄격하게 적용되는 권위주의적 국가이고, 상류계급을 '하이소'(High society)로 서민층을 '로소'(Low society)로 분리하는 등 신분 차별의 잔재가 많이 남은 곳이다. 종교적 가치관을 보수적으로 해석해 현세를 전생의 결과로 바라보고 순응하는 것이 때론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태국 사회·문화 연구가 전공인 이채문 탐마삿대 출신 박사는 "태국 드라마에서 악인은 극에서 미치거나 혹은 불교에 귀의하곤 한다"며 "이런 분위기에서 '더 글로리' 속 학폭 피해자 동은(송혜교)이 스스로 심판자가 되고 삶을 주체적으로 쟁취해 나가는 모습이 태국 젊은 시청자들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2020년 반정부 시위 등 청년 세대가 주도하는 개혁 운동의 흐름 속에서 '더 글로리'가 부패한 연예인 등 특권층을 고발하고 공정과 평등의 담론을 달구는 연료로 쓰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더 글로리'에서 학폭의 원인은 부의 대물림과 부패한 공권력 탓으로 그려진다. 동은은 그 권력의 카르텔을 하나둘씩 응징한다. '지금 우리 학교는'(넷플릭스)을 비롯해 '약한 영웅'(웨이브) '돼지의 왕'(티빙) 등 최근 1년 새 잇달아 나온 학폭 소재의 K콘텐츠와 달리 태국에서 '더 글로리'가 유독 학폭 문제를 공론화하는 계기가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이 박사는 "2020년 쁘라윳 정권 퇴진 시위에서 볼 수 있듯 태국의 젊은 세대는 군부와 왕실로 대표되는 특권층에 반발하고 있다"며 "정의와 평등이란 화두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이들이 '더 글로리' 속 피해자와 가해자 간 권력관계의 전복적 서사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바라봤다. 같은 해 태국 반정부 시위 행렬에선 한국 그룹 블랙핑크의 노래 '킬 디스 러브'가 울려 퍼졌다. "태국 젊은이들이 정부에 맞서는 수단으로 K팝을 든 것"(로이터통신)처럼 '더 글로리'가 사회 운동의 무기가 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K콘텐츠가 인권 보호와 저항의 '피켓'으로 활용되는 곳이 태국만은 아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그룹 방탄소년단을 백악관으로 초대해 '반(反)아시안 증오범죄'에 대한 메시지를 냈다. 백인 중심 주류 문화에 균열을 낸 K콘텐츠가 다양성이란 대안적 서사로 지지 기반을 넓힌 결과였다.
K팝을 좋아하는 아르메니아의 소녀들은 2020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전쟁이 발생하자 한글로 쓴 팻말을 카메라 앞에서 들어 올리며 종전을 호소했다. 영국 방송 BBC는 'K팝에 영감 받은 밴드(나인티원)가 카자흐스탄의 젠더 규범을 바꾸다'(2021)란 기사에서 K팝이 보수적인 나라에서 전통적인 젠더 규범을 깨는 문화적 혁명으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조명했다.
한국 대중문화가 '탈정치'를 강요받으며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국가 검열과 규제의 대상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현 상황은 격세지감이다. 김헌식 카이스트 미래세대 행복위원회 위원은 "'더 글로리'를 비롯해 '오징어 게임', '기생충' 그리고 K팝은 경제 불평등, 청소년 문제 등 우리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 기득권을 비판했고, 영미권 중심 대중문화에 균열을 냈다"며 "그렇게 주류에 대항해 성장한 K콘텐츠를 세계의 청년들이 저항의 수단으로 활용하며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세를 불린 K콘텐츠에 대한 젊은 세대의 기대가 때론 날카로운 부메랑으로 돌아와 박히기도 한다. "차별 금지"를 외쳤던 K팝 스타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일제히 침묵해 따가운 시선도 받았다. 신기욱 스탠퍼드대 월터 쇼렌스틴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소장은 지난해 봄 미국 외교 전문지 디플로맷에 공동으로 기고한 글에서 "K팝 기획사들이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팬덤이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주제에 대해선 언급하지 못하게 한다"며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려면 그 침묵을 깨야 한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