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탄소중립 산업법(Net-Zero Industry Act)' 입안을 공식화했다. 태양열, 풍력, 수소와 같은 역내 친환경 산업 육성에 물적∙제도적 지원을 쏟아붓겠다는 게 법의 골자다.
세부 내용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법은 EU가 비판해 온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IRA)'과 꼭 닮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EU가 "미국과 일부 국가에서 생산되는 전기차, 배터리에만 감세 등 혜택을 줘서는 안 된다"고 법 개정을 요구해도 꿈쩍하지 않자 '맞불 개념'으로 고안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이다. 가장 큰 수출 시장인 미국과 EU가 '합법적 방법'으로 또 하나의 무역 장벽을 세운다면, 불이익을 받는 한국 기업과 산업은 도태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EU 행정부인 집행위원회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18일(현지시간) 유럽의회 본회의에 출석해 "탄소중립 산업법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전날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유럽을 청정기술∙산업의 본거지로 만들 것"이라고 연설한 데 이어, 신규 법안을 만들 때 협의해야 하는 상대인 유럽의회를 찾아 강력한 입안 의지를 재확인한 것이다.
탄소중립 산업법은 EU가 역내 친환경 산업에 투자하는 근거법이다. 관련 연구·개발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물론, 규제를 간소화하고 승인을 가속화하는 등의 제도적 지원도 동반될 것이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탄소중립 산업법이 EU의 '반도체법'과 동일한 형태로 설계될 것이라고도 예고했다. 반도체법은 '2030년까지 반도체 생산시장 점유율을 현재 9%에서 2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로 430억 유로(약 57조2,446억 원)를 투입한다는 내용이다.
집행위는 탄소중립 산업법이 'IRA 대응법'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WEF에서 "IRA에 대한 우려가 많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라며 "유럽 산업을 매력적으로 유지하려면 'EU 바깥에서 제공되는 인센티브'(IRA)와 경쟁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을 설득할 수 없다면, 비슷한 법을 만들어 자국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다. 한병화 유진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IRA처럼 친환경 제품 생산과 설비 투자에 직접 보조금을 지급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친환경 산업 육성을 위해 마련하는 기금 이름이 '유럽주권기금(European Sovereignty Fund)'이라는 건 미국, 중국 등을 중심으로 노골화한 보호무역 기조에 대한 EU의 위기감을 보여준다.
EU 내부에서는 해당 법이 관련 분야 선진국인 독일, 프랑스 등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법이 EU 전체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 의견이다. 마틴 포터 케임브리지 지속가능성 리더십 연구소 이사장은 "탄소중립 산업법은 (환경 이슈를 선도해온) EU의 경쟁력을 유지∙강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U의 행보는 한국에는 악재에 가깝다. '합법'으로 포장한 무역 장벽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어서다. 탄소중립 의제를 끌어가는 EU가 역내 산업을 노골적으로 키우면, 역외 국가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결국 EU의 '탄소중립 동맹'에 속하려고 노력하든, 미국 IRA 법안에서 예외 특혜를 얻어내든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면 대책을 서둘러 세워야 한다. 임재민 에너지전환포럼 사무처장은 "빠르게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불이익을 피하려고 국내 산업이 EU 등 역외로 옮겨 가는 '산업 공동화 현상'이 가속할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