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대 직장인 김영배(가명)씨는 얼마 전 유통 플랫폼 '스팀'을 운영하는 밸브사에서 출시한 휴대용 게이밍 컴퓨터 '스팀덱'을 구매했다. 평소 데스크톱 컴퓨터에서만 할 수 있는 게임을 두 손으로 들고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실제로 받아든 기기는 0.7㎏. 들고 다니면서 하기엔 좀 묵직한 무게다. 하지만 김씨는 만족했다. 컴퓨터 앞에 앉지 않고서는 할 수 없었던 게임을 편하게 소파나 침대에 앉아서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 출시된 이래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 유행을 불러일으킨 휴대용 게이밍 컴퓨터 '스팀덱'이 12월국내 배송을 시작한 이래, 국내 게임 마니아들 사이에서 환영받고 있다.
21일 게임업계에 따르면, 스팀덱을 판매 중인 밸브사는 공식적으로 스팀 판매량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스팀덱의 운영체제인 스팀OS 개발을 지원한 KDE의 개발자가 지난해 10월 "스팀덱의 판매량이 100만 대를 넘겼다"고 밝히면서 기대 이상의 인기를 끌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스팀덱은 밸브사가 운영하는 세계 최대의 온라인 게임 유통 플랫폼 '스팀'에서 유통되는 게임을 들고 다니면서 플레이할 수 있도록 개발된 컴퓨터다. 겉보기엔 휴대용 게임기지만, 울트라모바일 컴퓨터(UMPC)로 분류되기도 한다. 기존 컴퓨터나 노트북과 달리 콘솔(게임 전용기기) 처럼 키보드가 아닌 게임 패드 버튼을 입력 기기로 갖추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밸브는 북미와 유럽에선 직접 스팀덱을 판매하고, 한국 등 아시아 4개 지역에서는 일본의 코모도를 파트너로 선정해 지난해 12월부터 배송을 시작했다. 화제의 제품이다 보니 유통에 잡음도 많다. 늦은 출시를 기다릴 수 없었던 아시아권 게이머와, 정식 출시가 되지 않은 오세아니아·남미 등 다른 지역 게이머는 제3의 소매업체(리셀러)를 통해 비공식 구매를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소비자는 손상된 제품을 구매했다며 피해를 호소하기도 했다. 밸브는 11일 "비공식 구매에 주의해 달라"는 공지를 올렸는데, 호주·뉴질랜드 등 미출시 지역 게이머들의 "출시 일정이나 공개하고 말하라"는 항의를 받았다.
지난해 2월 출시 직후, 서구 언론에서는 스팀덱이 장점보다는 개선해야 할 점이 많은 '게임기'라는 평가가 많았다. 비슷한 이동형 게임기인 '닌텐도 스위치'와 비교되면서 상대적으로 무게가 무겁고, 배터리 소비가 빠르고,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선 이미 전 세계 1억대 이상을 판매하고 '포켓몬스터'나 '동물의 숲' 등 인기 게임도 독점한 닌텐도 스위치의 아성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현재는 예상을 깬 흥행 덕택인지, '컴퓨터'로서 스팀덱의 활용성이 강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기존의 스팀OS 외에 윈도우를 설치하고 스팀 외부에서 유통되는 게임이나 일반 프로그램까지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밸브의 창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게이브 뉴얼도 앞서 "스위치와 스팀덱은 대상이 다르다"며 스팀덱의 목표 소비층은 하이엔드(고성능 추구) 게이머라고 밝혔다.
무엇보다 스팀덱이 인기몰이를 하게 된 것은 그 기반이 되는 '스팀' 덕이다. 스팀 내 상점에는 지난해 화제작인 '엘든 링'을 포함한 웬만한 PC 게임이 유통되고 있다. 온라인 게임의 반댓말로 '스팀 게임'이란 용어가 통용될 정도다. 따라서 스팀에서 이미 많은 게임을 구매해 보유한 이용자라면 그 게임을 들고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스팀덱에 어느 정도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스팀덱의 유행을 계기로, 노트북과 태블릿 중간 수준 크기에 게임 구동 능력을 갖춘 기존의 'UMPC' 기기도 주목받고 있다. 중국 제작사들이 개발한 'GPD WIN'과 '윈엑스플레이어', '아야네오' 등은 소형 컴퓨터지만 스팀덱처럼 게임 패드 입력 버튼을 갖추고 있다.
스팀덱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유사 기기도 등장했다. 로지텍의 'G 클라우드'가 지난해 10월에 출시됐고, 레이저의 '레이저 에지' 또한 CES 2023 전시장에 등장하며 출시를 예고했다. 이들 기기는 모바일 OS인 구글 안드로이드를 탑재했기에 컴퓨터보다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 더 가깝지만, 클라우드 기능을 통해 일부 PC게임의 원격 플레이가 가능하며, 게임 패드 입력 버튼이 붙어있다.
다만 UMPC나 유사 기기들이 본격적으로 대중성을 가지기엔 시기상조라는 지적도 있다. 들고 다니는 기기라 고성능을 요구하는 PC 게임을 완벽하게 실행하는 데엔 무리가 있는데,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처럼 들고 다닐 만큼 가벼운 것도 아니기 때문. 실제 스팀덱 등장 이전까지 UMPC 제작사들은 '인디고고' 등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에서 수요를 보고 제품을 제작·판매하는 방식을 채택해 왔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게임이 모바일과 고성능을 요구하는 PC·콘솔 게임으로 분화한 상황에서 휴대용 게임기가 생소하거나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면서도 "소위 '트리플A급'에 가까운 스마트폰 게임이 등장하고 PC와 모바일에서 두루 이용 가능한 '크로스플레이' 게임이 유행하는 점을 고려하면 스팀덱과 비슷한 기기가 늘어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