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 스타트업에 취업한 구모(27)씨는 설 연휴를 앞두고 조카들에게 세뱃돈을 얼마 줄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지난해 추석 때 조카 3명에게 1만~3만 원씩 줬다가 실망하는 표정을 본 기억이 생생해서다. 올 설에는 5만 원으로 올려주려고 마음먹었지만 사회초년생인 그에게 15만 원의 지출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구씨는 20일 “조카들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면 아깝지 않지만 마음 한구석이 무거운 건 어쩔 수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국민의 일상을 멈추게 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의 터널을 지나 3년 만에 찾아온 대면 설 연휴. 사회적 거리두기까지 해제돼 반가움이 앞설 법도 하지만, 세뱃돈과 선물 비용을 신경 써야 하는 직장인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이들을 괴롭히는 가장 큰 원인은 해가 바뀌어도 계속 치솟는 물가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24년 만에 가장 높은 5.1%를 기록했다. 세부 항목들도 하나같이 오름세다. 식료품은 5.1% 상승했고 음식 및 숙박도 7.6% 올랐다. 의류 및 신발 역시 3.1% 뛰었다. 올해도 전기요금을 비롯해 버스ㆍ지하철 요금 인상이 예고되는 등 물가 상승세는 좀처럼 꺾일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6월 결혼한 회사원 이모(33)씨도 양가 부모께 드릴 선물과 용돈 금액을 최근 급히 상향 조정했다. 원래 10만 원 상당의 고기 세트와 같은 금액의 용돈을 드릴 계획이었는데 “선물과 용돈을 합쳐 양가에 각각 최소 40만 원은 쓰는 게 예의”라는 친구들의 조언 아닌 조언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 이씨는 “조카들 용돈까지 포함하면 족히 100만 원은 각오해야 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실제 시민들은 대면 명절을 반기지 않는 기색이 역력하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지난달 자사 회원 828명에게 물으니 절반에 가까운 47%(389명)가 “명절 비용 지출이 부담된다”고 답변했다. 평균 예상 지출 비용은 가족 용돈의 경우 38만 원, 선물은 40만 원이었다. 성인남녀 6,044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29%(1,760명)가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세뱃돈을 안 주고 안 받도록 하자”는 데 동의했다.
최근엔 1만 원권과 5만 원권 사이 ‘3만 원’짜리 지폐를 만들자는 의견도 호응을 얻고 있다. 2009년부터 발행된 5만 원권이 경조사나 세뱃돈의 기본 단위를 올려 부담을 가중시켰다는 것이다. 직장인 장모(26)씨는 “3만 원권 발행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요즘처럼 공감한 적이 없다”고 씁쓸해했다.
‘성의 표시’를 매개로 한 이런저런 고충이 갈수록 명절의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물가 상승에 비해 임금 인상은 더딘 탓에 용돈과 선물에 대한 기대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며 “선물 비용을 조율하는 등 가족끼리 대화를 통해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