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12일 공개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해 일본 정부는 13일 침묵했다. 다만 불쾌한 침묵은 아니다. 물밑에선 “수용할 여지가 있다”는 기류가 있다.
강제동원으로 이득을 본 일본 기업 대신 한국 기업이 한국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해 배상하는 방안이라는 점이 일본이 주목하는 포인트다. “1965년 맺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배상 책임이 완료됐다”는 일본의 입장과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전문가들도 "수용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 민심은 다르다. “일본을 알아서 면죄해 주는 방안이냐”며 강하게 반발한다. 한국 정부안에는 일본 기업의 사과와 배상 참여 등 최소한의 '성의 있는 호응 조치'마저 생략돼 있다. 이에 정부·여당은 피해자들에게 제시할 호응 조치를 끌어내기 위해 일본 설득에 나섰다.
13일 일본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정부는 공식 입장을 내지 않은 채 "한국 정부와 긴밀한 의사소통을 하겠다”고 했지만, “일본 피고 기업의 자금 출연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으므로 수락할 여지가 있다”(정부 고위관계자·요미우리신문) 같은 언급이 흘러나왔다. 아사히신문도 "한국이 피고 기업의 기여를 계속 요구하는 것은 힘들다는 인식을 보였단 점에서 진전된 안”이라는 외무성 간부의 말을 전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사설에서 "한일 관계를 중시하는 윤석열 정부의 태도가 반영된 현실적인 방안"이라며 "일본도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갈 길은 멀다. 한일 정부 협의를 통해 최종안을 도출하고, 한국 정부가 최종안을 발표하면, 일본이 ‘성의 있는 호응 조치’를 하는 수순이 될 전망이다. 관건은 호응 조치의 수준이다. 일본 기업들이 배상금 출연 의사를 자발적으로 밝히고 동참한다면 한국 여론이 일부 누그러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12일 토론회에서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 국장은 “피고 기업의 자금 출연을 먼저 요구할 수는 없다. 창의적 해법이 필요하다”며 신중론을 폈다.
한국 정부·여당은 일본에 대한 설득을 시작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13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장관과 통화하며 의견을 교환했다.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여야 의원들과 함께 12일 일본을 방문해 일한의원연맹 의원들을 만났다. 아소 다로 자민당 부총재,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 등과도 협의했다.
당장의 진전은 없었다. 정 위원장은 "일본 정치인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한일 관계 개선 의지가 굉장히 확고하다고 느꼈다'고 했다“면서 "우리는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일본은 성의 있는 호응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일본 전문가들은 이번엔 일본이 전향적으로 나설 차례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는 “한국에서 굴욕적이라거나 저자세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지금 상황에서 현실성 있는 거의 유일한 방안”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이번이 한일 관계 개선의 사실상 마지막 기회인 만큼, 일본 피고 기업이 비공식 사죄나 자발적 기부를 한다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는 “‘성의 있는 호응 조치’에 대해 양국이 이미 물밑에서 의견 접근을 이뤘을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이를테면 일본 게이단렌 같은 재계 단체가 먼저 한일 경제 협력과 관계 개선을 명분으로 큰 틀에서 사과, 반성의 뜻을 밝히고 피고 기업을 포함한 여러 기업이 사과나 자발적 기부를 하는 식이다.
물론 일본 정부가 이 같은 의견을 귀담아들을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