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가 40년 묵은 미제 사건으로 다시 들썩이고 있다. 1983년 에마누엘라 오를란디(당시 15세) 실종 사건을 바티칸 검찰을 통해 재조사하겠다고 교황청이 밝힌 것이다. 교황청 직원 가정의 5남매 중 넷째였던 오를란디는 그해 6월 로마에 플루트 레슨을 받으러 갔다가 바티칸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탈리아 수사당국은 '성매매 조직에 납치됐다'는 잘못된 제보에 정신이 팔려 소녀의 행방을 놓쳤고, 바티칸은 이탈리아 영토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며 뒷짐을 졌다.
□ 소녀를 삼킨 미궁에선 온갖 추측이 지칠 줄 모르고 피어났다. 그중 하나는 '마피아 개입설'이었다. 바티칸과 유착된 로마 범죄조직이 이를 알고 있는 오를란디 부친을 입막음하려 딸을 납치했다는 것. 소녀의 실종이 이태 전 벌어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미수사건과 관련 있다는 설도 판쳤다. 가족에게 '교황 암살 미수범을 풀어주면 아이를 돌려보내겠다'는 괴전화가 걸려온 것이 단초였다. 장난 전화로 판명된 이 해프닝은 구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나 부패한 유력 추기경을 교황 암살 배후로 지목하는 음모론으로 부풀었다.
□ 교황청은 의혹의 중심이었고 이로 인해 바티칸 경내 묘지가 두 차례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었다. 2012년 성 아폴리나레 성당 지하무덤 발굴은 마피아 개입 수사 과정에 이뤄졌다. 죽은 마피아 두목이 소녀를 납치했고 무덤에 단서가 있다는 제보를 받은 검찰은 무덤 소재를 추적하다가 역대 교황의 유해를 모신 이 성당에 당도했다. 유골 분석 결과 낭설로 밝혀졌지만, 중범죄자가 거액의 헌금을 내고 성지에 안장됐다는 사실에 세상은 경악했다. 2019년 테우토니코 묘역 발굴은 소녀가 그곳에 매장됐다는 제보를 받은 가족의 요청을 교황청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 묘지 발굴도 허사로 돌아가자 이탈리아 검찰은 2020년 수사를 종결했다. 3년이 흘러 바티칸이 직접 수사에 나선 건 이 사건이 다큐멘터리 영화(제목 '바티칸 걸')로 제작돼 지난해 10월 공개된 영향이 컸다. 다큐는 교황청이 진상규명에 비협조적이었고 실종 사건 1주일 전 바티칸 고위 성직자가 오를란디에게 성적으로 접근했다는 증언도 있다고 폭로했다. 가족들은 재수사 결정에 놀랐다며 결과를 기대하는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