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주말, 음악회에 다녀왔다. 공연장에 가면 자주 보게 되는 얼굴들을 이날도 마주쳤다. 음악계 종사자도 아닌 그들에게 음악은 어떤 존재이기에 음악회에 갈 때마다 마주치게 되는 걸까. 그들 중엔 피아노 연주를 즐기는 방송국 기자와 피디도 있다. 아마추어 연주자끼리 모여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는데 다음 음악회를 준비하며 나누는 대화가 꽤 진지하다. 어릴 땐 연습하는 게 그렇게 싫었다는데 지금은 왜 자발적으로 연습에 매진하고 싶은 것일까. 성인이 된 이들에게 음악을 연주하는 일은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에게 음악이 어떤 의미인지,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많은 사람을 인터뷰해 책으로 낸 적도 있다. 음악이 직업인 전문 연주자들에게도 물었고 음악가는 아니지만 음악 사랑이 몸과 마음과 일상에 꽉 차 있는 사람들에게도 물었다. 각각의 답변에는 감동과 감격이 있었다. 음악과 함께 살아 온 인생이 그들이 좋아하는 음악과 많이 닮아 있었고 음악에 진심으로 의지해 온 그들의 시간이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좋아서 하는 일의 과정과 결과는 확실히 다른 모양새가 있다.
얼마 전엔 '피아노 치는 할머니가 될래'라는 책을 제목에 이끌려 읽기 시작했다. 일본 작가 이나가키 에미코가 쓴 중년 여성의 피아노 찬가다. 잘 치고 싶은 의욕은 있지만 마음먹은 대로 따라주지 않는 손가락과 머리,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력의 한계는 어느새 어른만이 즐길 수 있는 피아노의 즐거움을 발견하면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저자는 인생을 살아보니 성가셔 보이던 손가락 번호를 지키는 게 중요함을, 능숙한 연주보다 작품을 향한 풋풋한 사랑을 유지하는 게 더 의미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아울러 아무리 늙고 시들어도 드뷔시의 ‘달빛’을 근사하게 연주하는 할머니는 얼마나 멋진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그때는 몰랐고 이제는 알게 된 저자의 삶에 대한 통찰과 태도가 가슴 뭉클하게 만든다.
앨런 러스브리저 전 가디언 편집국장의 쇼팽 발라드 1번 도전기 '다시, 피아노'는 또 어떤가. 그는 이 곡을 연습하고 완주해내는 과정에서 발견한 삶의 가치를 보여준다. 세계적 특종 보도를 다루는 치열함 속에서도 "음악이 삶에 기쁨을 더해줄 것"이라며 악기를 배우게 하신 어머니의 선택이 옳았다고 고백하는데 두꺼운 책 가득 담아낸 이유 하나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알렉스 로스, 엠마누엘 액스, 머레이 페라이어, 알프레트 브렌델, 다니엘 바렌보임 등 세계적 아티스트, 작가, 신경과학자들을 만나 직접 인터뷰한 내용도 흥미롭다.
유튜브 '겨울서점' 운영자인 작가 김겨울의 음악 사랑은 저서 '아무튼 피아노'에 잘 나와 있다. 악기와 연애하듯 축적해 온 시간은 피아노를 향한 절절한 사랑 고백 같다. 그만의 레퍼토리를 찾아내고 작품에 얽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진지함은 일류 피아니스트와 다를 바 없어보였다. 음악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꾹꾹 눌러쓴 문장들은 여러번 읽어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클래식 음악은 내가 가진 마지막 벽이다. 유일한 마음의 집이 활활 타올라 없어져도 홀로 불타지 않는 벽, 노래에도, 말소리에도, 대화에도, 그 어떤 것에도 기댈 수 없을 때, 지친 몸을 끌고 가서 털썩 주저앉으면 기댈 수 있는, 푹신한 소파는 못 되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든든한 벽. 거칠고 두꺼운 벽에 머리를 기대면 나보다 먼저 기쁘고 슬펐던 이들이 온갖 소리로 나를 지탱해준다. 이 벽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
알랭 드 보통은 저서 '불안'에서 "예술(음악)은 삶의 가장 깊은 긴장과 불안에 해법을 제공하는 매개체"라고 적었다. 음악은 불안과 부족을 메꾸는 기능적 역할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정신을 쉬게 하는 종교이자 물질로 해결되지 않는 공허함을 채워주고 현실 문제를 달리 생각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음악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이 질문은 악기 연주나 음악회 참석 경험 유무와 관계없이 음악을 음미하는 것이 각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누구에게든 각자의 답변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답변을 찾는 과정은 즐거울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깊이 고민해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늘 함께했지만 깊이 인식하지 못했던 음악과의 관계도 다르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