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에 ‘뉴진스’라는 이름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데뷔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인 그룹인데도 신곡이 나오면 곧바로 음원 차트 1위로 직행하고, 음반은 나오자마자 수십만 장이 팔려 나간다. 웬만해선 거의 화제가 되지 않는 뮤직비디오까지 연일 온라인에 오르내리며 사실상 K팝 관련 이슈를 독점하고 있다.
음원 차트는 이미 뉴진스 세상이다. 5일 오후 2시 기준 음원 플랫폼 멜론의 100 차트에선 1위 곡 ‘디토(Ditto)’를 비롯해 ‘OMG’(2위), ‘하이프 보이’(4위), ‘어텐션’(8위)까지 총 4곡이 톱10에 올라 있다. 2일 발매된 ‘OMG’를 제외한 3곡은 2일 자 주간 차트에서도 1위, 3위, 8위를 차지했다. 멜론 차트에서 한 가수의 곡들이 톱10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건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 같은 톱스타들에게도 극히 드문 현상이다. ‘OMG’는 단 두 곡이 담긴 싱글인데도 발매 첫날 50만 장 가까이 판매됐다.
뉴진스는 그야말로 K팝의 새로운 바람이다. “K팝 걸그룹이 이제는 뉴진스 전과 후로 나뉠 것“(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기존 K팝 걸그룹의 전형성을 벗어난 새로운 콘셉트와 마케팅, 음악으로 혁신을 이뤄냈다는 평가다. 팬들도 K팝의 주 소비층인 10, 20대는 물론 30대와 중년층까지 아우르며 K팝의 한계를 넘어서는 양상이다. 멜론 관계자도 “특정 가수의 여러 곡이 차트 상위권에 오래도록 머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면서 “다양한 세대의 사용자가 고루 들어야 가능한 인기”라고 말했다.
팬덤과 대중성을 고루 끌어안으며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는 만큼 논란도 뜨겁다. 데뷔 초 '쿠키'의 선정성 논란에 이어 신곡 ‘OMG’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짧은 장면이 논란의 불을 붙였다. 뉴진스 멤버들이 정신병동에서 치료를 받는 환자로 등장하는 이 뮤직비디오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 소셜미디어에 ‘뮤비 소재 나만 불편함? 아이돌 뮤비 그냥 얼굴이랑 안무만 보여줘도 평타는 치...’라는 글을 올리는 누군가를 비춘다.
뮤직비디오는 의사 가운을 입은 멤버 민지가 소셜미디어 작성자에게 ‘가자’라고 말하면서 끝이 나는데, 이를 두고 데뷔 당시 불거졌던 논란에 맞선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가자’라는 대사가 ‘우리와 함께 가자’라는 포용과 ‘병실로 가자’라는 배척의 뜻을 함께 품고 있어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뉴진스의 음악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평론가들도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 김도헌 평론가는 “K팝 산업 성장에 있어서 팬덤의 적극적 참여가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때 팬들의 해석과 비판의 여지를 축소시키는 메시지를 굳이 넣었어야 하나 싶다”고 말했다. 반면 김영대 대중음악평론가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규정하는 나 사이의 갈등, 아이돌이란 존재가 갖고 있는 정체성의 문제, 아티스트와 팬의 관계 등 다양한 은유와 상징이 담긴 작품인데 특정 부분만을 단정적으로 판단해 확대 해석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도 "마지막 장면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나올 법한 반응이지만 크게 문제될 정도라고 보진 않는다"고 말했다.
일부 논란에도 불구하고 뉴진스의 음악만큼은 국내외에서 독보적이라 할 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이프 보이' '어텐션' '쿠키' 같은 곡들은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스·타임·롤링스톤, 영국 NME 등 유력 매체들의 연말 결산 목록에 오르며 해외 평단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강렬한 멜로디와 비트에 힘을 잔뜩 준 퍼포먼스가 주를 이루는 기존 K팝과 달리 레트로 감성을 끌어오면서도 현대적이고 세련된 음악과 안무는 세대를 초월한 인기의 첫째 비결로 꼽힌다. K팝 곡으론 유일하게 '쿠키'를 지난해 최고의 곡들 중 하나로 꼽은 뉴욕타임스도 이 노래의 가장 인상적인 측면으로 "맥시멀리즘과 극적인 요소가 없는 편안함"을 꼽았다.
여기엔 뉴진스의 음악적 키를 쥐고 있는 민희진 어도어 대표와 프로듀서 겸 DJ, 작곡가인 250(본명 이호형)의 역할이 크다. 민 대표는 “K팝의 암묵적인 공식을 깨고 내가 원하는 음악으로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힙합, 얼터너티브 R&B, 인디 팝, 보사노바, 재즈, 일본의 시부야계 등 기존의 K팝 시스템에선 비주류인 장르들을 즐겨 듣는 민 대표의 취향은 그가 발탁한 프로듀서 겸 작곡가 250을 통해 드러난다.
뉴진스가 발표한 6곡 중 4곡을 쓴 250은 자신의 솔로 앨범 ‘뽕’으로 증명했듯 국내 프로듀서 중 가장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음악가로 꼽힌다. 각종 음원 차트를 휩쓸고 있는 '디토'는 250의 역량을 보여주는 곡이다. 4분의 8박자로 잘게 나눈 비트와 130 안팎의 빠른 BPM(분당 박자 수)이 특징인 볼티모어 클럽 댄스 리듬에 아련한 감성을 접목한 '디토'는 실험성과 복합성을 숨긴 채 대중적이고 간결한 작법으로 K팝에 무관심하던 중년 층까지 사로잡고 있다.
250과 같은 기획사 소속인 힙합 듀오 XXX의 멤버인 프랭크(FRNK·본명 박진수)가 작곡한 'OMG' 역시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과 힙합의 하위 장르인 UK 개러지, 트랩 리듬을 담은 힙합 R&B 곡으로 간단치 않은 비트 전개를 듣기 편한 편곡으로 듣는 이를 끌어들인다.
화려한 미술과 파워풀한 퍼포먼스에 치중하는 K팝 뮤직비디오 트렌드를 거스르는 영상 연출도 뉴진스만의 차별점이다. 특히 'OMG'와 '디토', 거기에 '어텐션'까지 연결시키면서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뮤직비디오의 스토리텔링 방식은 논란과는 별개로 뉴진스라는 텍스트를 한층 풍성하게 만든다.
김영대 평론가는 “뉴진스는 음악과 안무, 스타일, 외모, 뮤직비디오 등 개별 요소의 총합이 아니라 전체가 유기적으로 디자인된 그룹”이며 "K팝의 맥시멀리즘에서 벗어난 탈(脫)K팝적인 방법론으로 K팝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