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정부가 마약 조직과 경찰의 유착관계를 척결하기 위해 경찰 고위직 300여 명에게 일괄 사표를 받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행동대원'에 불과한 하위직 경찰들을 솎아내 봐야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서장급 이상 고위 경찰들에게 책임을 물어, 경찰 조직을 대대적으로 쇄신하겠다는 것이다.
5일 필리핀스타 등 현지매체에 따르면, 벤자민 아발로스 필리핀 내무장관은 지난 3일 경찰청장을 필두로 마약 단속 업무를 하는 전국의 서장급 고위 경찰직 300명에게 일괄 사표 제출을 지시했다.
필리핀 정부는 이들에게 사표를 받은 뒤, 5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를 통해 혐의 유무를 판단할 방침이다. 유착 관계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해당 경찰관은 현장 복귀가 가능하다.
필리핀 정부의 이례적인 움직임은 그만큼 경찰 고위직과 마약 조직의 유착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6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취임한 후 마약 조직을 비호하고 마약 배달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된 고위직 경찰은 12명에 달한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이 관할하는 경찰서 내에서 마약을 판매하는 등 대담한 범죄 행각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발로스 장관은 "동맹군이 뒤에서 총을 쏘는 상황에서 전쟁을 이기긴 어렵다"며 "마약 단속 업무를 담당하는 서장급 간부 대부분이 마약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파악되는 이상, 국민 신뢰 회복을 위해 이번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필리핀 정부의 이번 조치는, 마약 사건 수사의 초점을 기존의 '유혈 진압'에서 '마약 유통 시스템 제거' 쪽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전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부는 이른바 '마약과의 전쟁'을 선언하고, 경찰이 마약 사건 연루자가 투항하지 않을 경우 현장에서 사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두테르테 대통령 재임 6년 동안 6,2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매년 1,000명 이상이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죽어 나간 셈이다.
하지만 마르코스 정권은 취임 이후 6개월 동안 마약 사건 용의자 46명을 사살하는 데 그쳤다. 이 과정에서 2만4,000여 건의 마약 사건을 단속했으며, 3만 명 이상의 마약 사범을 체포했다. 줄어든 사상자 수에서 보듯, 마르코스 정권은 최소한의 유혈 진압과 유통 시스템 제거 쪽으로 마약 범죄 단속 정책 방향을 잡은 상태다. 경찰 조직의 대대적인 쇄신도 마약 유통 시스템 제거를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본 것이다.
필리핀 경찰청은 마약 수사 기조와 관련해 지난해 11월 "앞으로 경찰은 자신들의 안전을 지킬 필요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용의자 사살을 최대한 자제할 것"이라며 "가능한 한 피를 흘리지 않는 방식으로 마약 범죄에 대처해 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