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이 사라졌어요"···유행을 비켜간 옛벽돌의 기품

입력
2023.01.06 04:30
11면

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오래 살아도 질리지 않는 집'. 건축주가 건축가에게 요구했던 단 하나의 조건이었다. 유행에 민감한 패션업계에 몸담은 지 40년. 패션직업학교 라사라를 이끄는 유주화(58) 대표의 바람은 그런 것이었다. 말하자면 유행의 최전선에서 지친 삶을 껴안는, 유행을 타지 않는 집. "평생 트렌드를 좇으면서 깨달은 것은 트렌디하지 않아야 오래간다는 사실이었죠. 내 집만큼은 화려하지 않고 담백한, 볼 때마다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집이었으면 했어요."

유 대표가 찾아간 건축가는 우아하고 섬세한 건축 작업으로 이름이 난 정재헌(모노건축사사무소 대표) 경희대 건축학과 교수였다. 경기 파주 전원 도시의 고즈넉한 풍광을 끌어안은 '파주 주택'(대지면적 448.2㎡, 연면적 270.05㎡)은 그렇게 탄생했다. 수백 년 된 고벽돌과 날 것 그대로의 나무, 정직하게 뻗은 선, 무심한 듯 인사를 건네는 작은 정원···. 언뜻 단순한 인상이지만,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유행의 변덕을 견디는 나지막하면서 은은한 기품을. 간결하고도 우아한 형태미부터 무려 열 가지나 되는 벽돌의 조적 방식,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마감 디테일까지, 집이 품은 내공과 내력은 입구에서부터 빛을 발했다.


삶의 이해로부터 출발한 집

파주 주택의 거주자는 유 대표와 대학생 아들, 두 식구. 건축가는 우선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유 대표와 성인이 된 20대 아들에게 어떤 공간이 필요할지 고민한 끝에 본채와 별채를 분리해 짓기로 했다.

유씨가 머무는 본채는 마당을 'ㄷ'자로 감싼 형태로 모든 공간에서 안마당이 보이는 구조다. 반면 아들의 공간인 2층 별채는 안마당 방향으로 창을 내지 않고 되레 벽을 세웠고, 내부는 원룸처럼 오픈된 공간으로 만들었다. 어머니의 단층집이 안마당을 향해 다리를 뻗고 누운 듯한 공간이라면, 수직으로 올린 아들의 집은 까치발을 들고 빼꼼히 바깥세상을 내다보는 듯한 모습이다. 그는 "중정이 있는 집이라고 해서 모든 공간을 마당을 바라보게끔 배치하면 공간이 단순해질뿐더러 독립성이 사라진다"며 "부모와 성인 자녀가 집을 편안하게 누리게 하려면 소통과 단절을 현명하게 다뤄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와 아들이 각자의 프라이버시를 누리게 한 것이다.

어머니의 노후 생활을 배려하기 위한 세심한 공간 배치도 눈길을 잡는다. 내밀한 공간인 안방을 건물 안쪽이 아닌 바깥쪽, 돌출된 공간에 뒀는데, 이는 건축주가 노후에도 마당을 온전히 즐기길 바라는 바람에서 설계됐다. 안방 두 면에 통창을 내 마당과 맞닿게 하되, 한지로 이중창을 만들어 필요한 만큼 시선을 차단할 수 있게도 했다. 시야는 가리면서도 빛은 투과시키는 한지의 특성을 활용한 덕에 문을 모두 닫아도 답답합 없이 온화한 빛이 감돈다. "언젠가 건축주가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됐을 때 안방에 앉아 마당에서 손주가 뛰노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큰 행복이겠어요. 가장 좋은 것을 쉽게 누릴 수 있는 집이 좋은 집이죠."

본채와 별채 사이에 마련된 사랑방은 '의사방'이란 별칭이 붙은 곳이다. 화장실과 샤워실을 갖춘 개별 공간으로, 안방과는 외부 공간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건축주가 남의 도움이 필요할 시기가 올 때 간병인이 내 집처럼 편안하고 쾌적하게 머무르면서 좋은 케어를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만든 공간"이란 설명이다. 종종 손님들이 와서 묵거나 건축주가 홀로 사색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사랑방은 다른 공간과 비교해서도 훌륭한 전망을 자랑한다. 주택 뒤편에 있는 송골공원 전경이 통창으로 들어와 가만히 앉아서도 마치 숲 한가운데 있는 듯 생생한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이 같은 공간 배치는 현재와 미래까지 건축주 가족의 삶을 이해한 데서 비롯된 셈이다.


중정, 미감이 흐르는 통로

공간 배치가 삶의 이해에서 출발한 실용성에 주목했다면 집 안팎에 흐르는 미감은 일상의 효율에서 벗어난 초연함에서 나왔다. 다양한 소재를 섬세하게 조합해 정적이고 고요한 분위기를 만드는 건축가의 특기가 어김없이 발휘됐다.

건축주가 원했던 '질리지 않는 집'의 하이라이트는 바라만 봐도 마음이 정연해지는 담백한 마당이다. 마당의 경계이자 건물 외벽인 고벽돌의 자태부터 남다른데, 같은 벽돌이라도 조적 방식이 다르다. "수백 년 된 벽돌을 이리저리 자르고 깨서 속살을 꺼내고, 쌓기 방식을 달리해 높이와 볼륨을 풍성하게 만들었죠.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집에 꼭 필요한 정성입니다." 외부 마감재로 쓰인 목재도 마찬가지다. 거친 벽돌과 대비되는 매끈한 나무 외벽과 문살 역시 배열과 간격을 달리해 다양한 표정을 입혔다.

마당 바닥은 단차를 이용해 아기자기한 변주를 줬다. 안방과 마당의 경계엔 나무 툇마루를 만들고, 본채와 사랑채를 잇는 작은 마당은 석재를 깔아 정돈했다. 중정 한편에 작은 정원을 만들고 화강암 가루인 마사토를 넓게 깔아 비워뒀는데 그 쓰임이 무궁무진하다. 가족은 창과 문을 통과해 비어 있는 마당을 수시로 오가고, 마음이 동하면 캠핑 의자를 갖다 놓고 쉬거나, 모닥불을 피워 망중한을 즐기기도 한다. 본채와 공원의 경계에 있는 뒤쪽 마당엔 하늘을 보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노천탕이 숨어 있다.

파주 주택의 마당은 동양화의 여백 같은 곳이다. 비움으로써 쓰임이 완성되는 셈. 이 집에 살면서 일상의 초점이 마당에 맞춰졌다는 유씨는 "하늘로 열린 마당을 매일 즐길 수 있는 건 축복"이라며 "빛과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중정은 말할 것도 없고 집 주변 자투리땅에 들어선 정원을 하나하나 살피다 보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진한 색채의 외관과 대비되는 내부는 동양적 무드의 부티크 호텔 같다. 원목 재질과 하얀 벽, 한지 창호가 단아하게 어우러졌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높은 천장고의 절반에 불과한 낮은 창이다. 정 교수는 "외부 시선을 차단하면서 풍경을 끌여들이기 위한 선택"이라며 "낮은 창에는 발 밑에서부터 시작되는 바깥 정원의 모습이 사철 단정하게 담긴다"고 설명했다.


나와 꼭 닮은 집에서 시작된 변화

건축주는 이 집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면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가고 있다고 했다. 가장 큰 변화는 골칫거리였던 불면증을 치유한 것이다. 새 집에 이사와 잠을 청한 첫날 밤, 유씨는 여태껏 경험해본 적 없는 달금한 잠을 잤다. "침대 없이 보료를 깔고 방 바닥에 누웠는데 푹신한 소파에 누운 듯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며 "자연과 교감하면서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하고 있다"고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이사와 함께 모든 가구를 처분했고, 패션업에 종사한 세월만큼이나 방대했던 옷장 속 잡동사니를 절반 가까이 줄였다. 나눔을 위한 플리마켓을 세 번이나 열었다고 한다. 취향으로 한껏 채운 집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비워낸 공간 자체를 취향으로 삼기 위해서다. "정적이고 단정한 집에 머물기 위해, 나 역시 생활의 무게를 줄여야겠지요. 평생 맥시멀리스트로 살았던 사람이 단숨에 미니멀리스트로 변신했으니 집이 가져온 변화가 실로 엄청나지 않나요."


파주= 손효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