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컨벤션센터. 샌디에이고·뉴욕 전시회와 함께 미국 3대 만화 축제로 꼽히는 LA 코믹콘(L.A. Comic Con) 행사가 한창이었다. 부스마다 만화에 진심인 이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뤘고, 만화 속 캐릭터로 정성스레 분장(코스프레)한 '찐팬'들도 넘쳐났다.
한껏 들뜬 만화 마니아들을 헤치고 전시회장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부터 익숙한 톤의 초록색이 눈에 띄었다. 한국 대표 포털 네이버가 미국에서 운영하는 웹툰 플랫폼 '웹툰'(WEBTOON)의 부스였다.
때마침 이 부스에선 누적 조회수 4억4,000만회를 기록 중인 로맨스물 '사이렌의 슬픔'(Siren's Lament) 작가 인스턴트미소(InstantMiso)의 팬사인회가 한창이었다. 네이버 웹툰 대기열은 다른 부스보다 유독 길었고, 팬들은 "꺄" 반갑게 소리 지르며 신나게 스마트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제니퍼 스위니(14) 양은 이렇게 말하며 뛸 듯이 기뻐했다.
부스 한편에선 인기 웹툰 작품 그림을 배경 삼아 기념 사진을 찍는 이들도 많았다. 올해로 미국 상륙 10년을 맞은 네이버웹툰이 미국에서 확실한 팬덤을 확보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뉴욕타임스(NYT)가 지난해 7월 미국 웹툰 성장세를 다룬 기사에 붙인 제목이다. NYT 표현처럼 미국인들은 이제 책장을 넘겨 만화책을 보기보다, 마우스 휠을 돌려 웹툰을 보는 일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 네이버가 있다. 모바일 데이터 분석업체 데이터에이아이(data.ai)에 따르면, 네이버웹툰은 미국 내 누적 애플리케이션(앱) 다운로드 및 수익에서 압도적 1위다. 지난해 2분기 기준 미국 월간 이용자 수는 1,200만 여 명에 이른다.
마블·DC를 보유한 만화 강국이자 모든 만화 기업이 선망하는 꿈의 무대 미국에서, 한국산 웹툰 플랫폼이 새로운 물결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네이버웹툰이 시작부터 꽃길을 걸었던 건 아니다. 네이버는 미국에 웹툰이란 용어조차 없던 2014년 스마트폰 화면을 세로로 내리며 보는 한국식 웹툰을 미국에 소개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는 만화는 만화책을 그대로 스캔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여전히 오프라인 기반 만화책이 시장을 꽉 잡고 있었다.
한국보다 불리한 환경을 감수해야 했다. 한국에서 웹툰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서비스다. 네이버나 다음 같은 강력한 포털의 슬하에서 자라, 처음부터 이용자를 끌어들이기 쉬웠다. 그러나 네이버·다음의 위세를 등에 업을 수 없는 미국에선 웹툰의 존재를 알리는 것부터 만만치 않았다.
네이버웹툰은 그래서 만화 축제 코믹콘을 공략했다. 마니아 층의 마음부터 얻자는 판단에서였다. 네이버웹툰 북미사업 콘텐츠 총괄 이신옥 리더는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처음 진출한 2014년은 미국인들이 웹툰을 모르던 때여서 코믹콘마다 찾아다니며 전단지를 돌렸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3년을 했더니 코믹콘에서 네이버 웹툰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겼고, 4년이 지나니 웹툰 캐릭터를 코스프레하는 사람들이 나왔다고 한다. 부스에 구름 인파를 끌어들이는 네이버웹툰의 최근 위상은, 맨땅에서 발로 뛴 좌충우돌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지도만 높여서 될 일은 아니었다. 사람을 모으려면 능력 있는 작가를 모셔야 했다. 하지만 웹툰이 뭔지도 모르는 만화작가들이 이름도 낯선 플랫폼에 선뜻 연재하겠다고 나설 리 없었다. 이 리더는 "작가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연재를 권유하면 대체로 우리를 수상하게 여기거나, '굳이 만화를 스마트폰으로 보겠냐'는 반응이 많았다"고 떠올렸다. 그는 "김준구 네이버웹툰 대표와 함께 작가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플랫폼을 설명하고 연재를 설득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발품 팔아 모은 연재작 중 인기작이 하나둘 나오자, 자연스럽게 작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미국 네이버웹툰은 기본적으로 한국과 서비스 방식이 같지만 다른 점도 있다. 정식 연재를 꿈꾸는 아마추어 작가들이 자유롭게 작품을 올리는 공간을 한국에선 '도전만화'라 부르지만 미국 웹툰에선 '캔버스'라 이름 붙인 게 대표적이다. 이 리더는 "처음엔 도전만화를 번역해 챌린지 리그(Challenge League)라 불렀는데, 미국 작가들이 경쟁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거부감을 가졌다"며 "그래서 '작가를 발견하는 곳이란 뜻의 디스커버(Discover)로 바꿨다가, 최종적으로 정식 작가로 승격되든 안 되든 자유롭게 자기 작품을 공유하는 공간이란 의미를 담은 캔버스(Canvas)가 됐다"고 소개했다. 한국의 성공 모델을 가져왔지만 미국 문화에 맞춰 현지화하면서 조금씩 스며들어간 셈이다.
미국 만화시장 기존 강자들도 네이버웹툰의 성공을 주목하고 있다. 마블코믹스와 함께 미국 시장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DC코믹스는 2021년 네이버를 웹툰 파트너로 선택했다. 배트맨이 동료들과 한 집에서 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배트맨: 웨인 패밀리 어드벤처'는 그 해 9월부터 네이버웹툰에서 단독 연재 중이다. 웹툰 시장 진출을 원하는 DC코믹스 측이 먼저 협업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10년 전만 해도 작가들을 찾아 다니며 연재를 설득하던 네이버웹툰이었지만, 이젠 슈퍼맨·배트맨·원더우먼 등 세계적 지적재산권(IP)을 보유한 절대강자로부터 먼저 협업을 제안받는 위치까지 올라섰다.
지난해 7월에는 네이버웹툰 연재작인 '로어 올림푸스'가 '만화계 오스카'로 불리는 아이즈너 어워즈(Eisner Awards)에서 수상하며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34년째 이어진 아이즈너 어워즈에서 웹툰이 수상 명단에 오른 건 처음이었다. "4, 5년 전만 해도 웹툰 회사에 다닌다고 하면 '웹툰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는 이 리더는 "이제는 회사 이름이 쓰여진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웹툰과 일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가 됐다"고 했다.
직접 진출을 택한 네이버와 달리,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현지 플랫폼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미국 시장에 뛰어들었다. 카카오엔터가 2021년 6,000억 원을 들여 품에 안은 타파스(Tapas)는 미국 최초의 웹툰 플랫폼으로, 네이버웹툰의 강력한 경쟁자다. 한국 웹툰 시장을 양분하는 두 회사가 미국에서도 경쟁하며 시장을 함께 키워가는 것이다.
아직 갈 길은 멀다. 미국에서 웹툰은 이제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수익을 키우는 단계다. 아직 한국처럼 웹툰 IP가 출판, 애니메이션, 영화 등으로 뻗어나가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이 리더는 "수익화를 넘어 산업화로 가는 중"이라고 표현했다. 시장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성장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플랫폼 하나로 미국을 정복하고 세계를 사로 잡은 넷플릭스처럼, '웹툰판 넷플릭스'를 향한 두 플랫폼의 꿈이 영글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