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광주서 목숨 걸고 찍은 사진 1868장… 42년 지나 진상규명으로 빛 봤다

입력
2022.12.2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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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진상조사위 본보에 보상금 1000만 원 지급
2020년 제공한 광주 미공개 사진 진상규명 기여 
계엄군 집단발포 재구성, 행불자 다수 신원 확인

5ㆍ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가 한국일보에 보상금을 지급했다. 1980년 ‘오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 본보 기자들이 생사를 넘나들며 찍은 2,000장 가까운 사진이 진상규명의 귀중한 사료로 쓰인 공을 인정한 것이다. 당시에는 신군부의 서슬 퍼런 검열로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 미공개 사진들이다.

진상조사위는 27일 “진상규명에 필요한 사진 등을 제공한 공로로 한국일보에 보상금 1,000만 원 지급을 의결했다”고 밝혔다. 본보는 2020년 6월 진상조사위에 1980년 5월 광주에서 촬영한 사진 1,868장을 제공했다.

38년간 잊힌 그날 광주의 진실

한국일보는 5ㆍ18 취재를 위해 사진부 고(故) 김해운, 한융, 박태홍, 김용일 기자를 열흘간 광주에 파견했다. 이들은 필름 90롤(한 롤은 평균 36컷) 분량을 촬영한 뒤 복귀했지만, 현장 사진은 거의 지면에 실리지 않았다.

파견 기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떠나 언론인으로서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늘 빨간색으로 쓴 신원확인용 메모를 품고 다니던 박태홍 전 기자는 2018년 5월 인터뷰에서 “카메라가 있어도 찍지 못했다.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몰라 몸을 숨기기에 바빴고, 시신 안치소에선 눈이 아려 오는 비참함에 차마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광주 시민들은 기자들도 적대했다. 외신과 달리 국내 언론은 독재정권의 입김에 눌려 광주의 현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탓이다. 5월 21일 신원도 모르는 시민군에게 구타당하고 카메라 가방을 통째로 빼앗긴 적도 있다. 고가의 장비는 다음 날 한국일보 광주지사로 돌아왔다. 박 전 기자는 “카메라를 돌려받은 덕에 어렵게나마 취재를 이어 갈 수 있었고 그 사진들이 오늘날 소중한 기록으로 남았다”고 했다.

미공개 흑백사진들은 그렇게 봉인된 채 38년 동안 잊혔다가 2018년 어느 날 본보 자료실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무참히 스러진 광주의 참상이 2,000여 컷의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중 일부가 ‘미공개 사진으로 본 5ㆍ18 광주… 묵묵히 삼킨 비극의 날들 (https://m.hankookilbo.com/News/Read/201805170494712652)’ 기사에 실렸다.

사진으로 이름 찾은 수많은 무명씨들

2020년 1월 출범한 진상조사위는 그해 6월 한국일보에 진상규명에 반드시 필요하다며 나머지 사진들을 요청했고, 필름 전체를 스캔했다. 조사위에 최초로 제공된 사진자료였다.

사진의 힘은 셌다. 행방불명된 다수의 신원이 극적으로 확인됐다. 조사위 관계자는 “적십자병원 영안실 사진에 나온 시신 일련번호와 순서, 옷가지를 5ㆍ18기록관 유품 등과 대조해 행방불명자 신동남, 양창근, 김재영씨의 소재 및 신원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YMCA 건물 앞에서 총격으로 사망한 김종연씨의 신원과 사망 경위도 본보 사진을 통해 최종 증명됐다. 조사위는 전남대 이학부 뒷산 가매장(광주상고 이성귀 추정) 유해의 이동경로와 수습과정 역시 밝혀냈다.

미공개 사진들은 계엄군이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자행한 5월 21일 현장 상황을 시간대별로 재구성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집단 발포 후 적십자병원 복도까지 가득 메운 총상환자 사진은 당일 사상자 실태를 확인할 수 있는 첫 자료이기도 했다.

진상조사위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위해선 제보와 자료 제공,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면서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고 당부했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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