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9일 찾은 전남 광양시 포스코케미칼 양극재 공장. 길이 50m에 달하는 열처리 장비 '소성로' 위에서 작업이 끝난 양극재가 층층이 쌓인 도자기(Sagger)에 담겨 모습을 드러냈다. 소성로에 원료를 넣은 뒤 생산 완료까지 걸리는 시간은 꼬박 이틀. 전구체와 리튬을 최대 900도의 열로 가공·결합해 제품을 만들고, 입자를 균일하게 만드는 입도 제어 작업과 이물질 제거까지 마치면서 완성된 세계 최고 품질의 양극재다.
티라미수를 떠올리게 하는 검고 고운 입자 형태의 양극재는 배터리 용량을 결정하는 동시에 전체 원가의 40%를 차지하는 핵심 소재다. 지난해 11월 세계 최대 9만톤(t) 규모로 종합 준공된 이 공장은 배터리 성능을 좌우할 소재 생산을 위해 쉴 틈 없이 돌아갔다. '산업의 쌀'로 여겨지는 철강제품 생산에 힘을 쏟던 포스코그룹이 차세대 먹거리로 콕 집어 키운 '신(新)산업의 쌀' 이차전지 소재가 세계적 자동차 회사들이 만드는 전기차에 더 많이 들어가면서다.
포스코케미칼 관계자는 이날 "현재 광양공장에서만 연간 3만t씩 만들어지는 양극재 생산량은 앞으로 9만t까지 늘어날 것"이라며 "음극재 생산도 안정화되고 있는 데다, 현재 광양공장 부지 인근에 짓고 있는 리튬 공장(약 6만 평)과 재활용 공장(약 5만 평)까지 공사가 끝나면 생산부터 재활용까지 사실상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국내 화학업계가 중국 등 해외에 의존했던 이차전지 소재를 국산화하는 것을 넘어,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높이며 국내 수출 산업에 새 힘을 불어넣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EV볼륨스가 최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배터리 3사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3분기 기준 26%(LG에너지솔루션 16%·SK이노베이션 6%·삼성SDI 5%)에 달했다. 글로벌 배터리사에 보내는 이차전지 소재 시장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불확실성 높은 투자처로 꼽혔지만, 굴뚝 산업에서 일가를 이룬 기업들이 그룹 차원에서 과감히 돈과 품을 들여 척박했던 땅을 비옥한 농지로 가꾼 성과를 톡톡히 누리게 된 셈이다.
최근 찾은 ①포스코케미칼 광양공장의 분위기는 이 같은 흐름을 반영하듯 희망이 넘쳤다. 주요 배터리사에 공급되는 하이니켈 NCM(니켈·코발트·망간)과 NCMA(니켈·코발트·망간·알루미늄) 양극재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덕이다. 이곳 관계자는 "품질이 세계 정상급이라고 인정받으며 국내 배터리 업계를 넘어 글로벌 완성차 업계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며 웃었다. 실제 포스코케미칼은 지난해 3분기에만 매출 1조553억 원을 올리며 지난해 같은 기간(5,050억 원) 대비 두 배 넘는 매출을 기록했고, 영업 이익도 818억 원에 달하는 등 9분기 연속 최대 실적 기록을 이어갔다. 앞으로 추가 투자 여력도 커진 셈이다.
이차전지 소재 사업에 뛰어든 다른 대기업들도 주머니를 확 열었다. ②롯데케미칼은 지난해 배터리용 핵심 소재인 동박의 국내 2위 제조사 일진머티리얼즈를 2조7,000억 원에 인수하는 등 과감히 투자했다. 신동빈 그룹 회장 의지 아래 2030년까지 배터리 분야에만 약 4조 원을 더 넣을 예정인 것으로 전해진 가운데, 롯데정밀화학, 롯데알미늄 등 계열사들도 배터리 4대 소재(양극재·음극재·전해액·분리막)에 직·간접적으로 투자·생산하며 미래 먹거리로 삼고 있다.
국내 최정상 배터리 공급업체로 꼽히는 LG에너지솔루션을 낳은 ③LG화학 역시 신성장 동력으로 이차전지 소재 사업을 점찍고, 양극재는 물론 핵심 원료 공급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충북 청주시와 전북 익산시 등에 이미 구축한 양극재 공장을 경북 구미시에 추가로 세우고 있고, 고려아연 계열사 켐코와는 합작 법인을 세워 양극재 핵심 원료 전구체 만들기에 나선다. ④삼성SDI도 에코프로비엠과 합작사 에코프로이엠을 설립, 하이니켈계 양극재 제품 생산에 공을 들이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경제 패권 구도에 발 빠르게 움직인 데 따른 효과도 기대된다. 당장 국내 이차전지 소재 기업들은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시행에 따른 반사이익을 얻을 거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IRA가 전기차 보조금과 세액공제 등 다양한 인센티브로 미국 내 전기차 시장을 키우면, 북미 제조 인프라를 키우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국내 배터리사 제품 수요가 크게 늘 것으로 기대되면서다.
산업통상자원부와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달 개최한 '배터리 얼라이언스 산업경쟁력 분과 회의'에서 전문가들은 IRA 등 탈(脫)중국에 초점을 맞춘 공급망 정책을 통해, 미국 내 전기차 수요가 증가하면 국내 배터리 기업을 통해 상당 부분 충당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안나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발표를 통해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수요 중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3%에서 2025년 44%로 큰 증가가 예상된다"며 "우리 기업들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2025년 69% 수준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 포스코케미칼은 5월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캐나다 퀘벡에 양극재 합작사 건립 계약을 맺으면서 북미 지역 시장을 경쟁회사들보다 먼저 차지할 기회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회사 관계자는 "내년까지 퀘벡 공장의 연간 생산 능력을 3만t 수준까지 갖출 계획"이라며 "2030년까지 양극재 61만t, 음극재 32만t, 리튬 30만t, 니켈 22만t 생산 체제를 구축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LG화학도 미국 테네시주와 양극재 공장 건설 업무협약을 체결했고, 양극재 기업 에코프로비엠은 SK온·포드와 손잡고 미국에 1조 원 규모의 양극재 공장을 지어 블루오벌SK(SK온·포드 합작사)에 니켈·코발트·망간(NCM)9 등 고성능 양극재를 보낼 예정이다.
다만 업계 안팎에서는 여전한 중국산 배터리 강세와 핵심 광물 확보 전쟁을 이겨내야만 성장 동력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다고 조언한다. 남인호 중앙대 화학신소재공학부 교수는 "핵심 광물 확보를 위해 폐배터리에서 필요한 양질의 금속을 확보하는 기술 확보 및 시장 활성화가 중요하다"면서 "앞으로도 언제든지 가격경쟁력에 대한 도전이 예상되는 만큼 기술 격차 확대와 자동화 등을 통한 원가 절감, 우수한 인재 육성 등을 꾸준히 고민해야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