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시간이라고요? 한국도 선진국인데, 그렇게 많이 일한다니요.”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눈을 크게 뜨며 좌중에 되물었다. 2018년 6월, 다음 달부터 한국이 주당 최대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단축’시키기로 했다는 말에 대한 즉각적 반응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 일하는지 알 수 없네요. 52시간도 여전히 높은 것 같은데, 한국의 노동 조건에 대해 정말 놀랄 만한 정보를 얻게 됐군요.” 전국경제인연합회 주최 대담에 참석했던 그는 연신 혀를 내둘렀다.
지난한 논의를 거친 노동시간 단축이 겨우 첫발을 뗐을 때, 각국 반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18년 2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법정근로 주 40시간에 연장ㆍ휴일근로 주 12시간 즉 흔히 말하는 ‘주 52시간제’의 도입이 확정되자, 이를 전하는 외신 태도에는 여전히 경악이 뚝뚝 묻어났다. “한국의 ‘비인간적으로 긴’ 주당 68시간 단축 법안이 통과됐다”(가디언) “주당 노동시간이 세계적으로 가장 ‘버거웠던’ 아시아 국가라는 타이틀을 한국이 드디어 내려놓았다”(코리에레 델라 세라)
당시 “이제야?” “아직도?”를 되묻던 이들은 지금 윤석열 정부가 본격 시동을 건 ‘주 52시간 유연화’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폴 크루그먼을 포함한 많은 이가 한국의 노동환경을 줄곧 뜨악하게 바라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이미 곳곳에서 ‘적정 노동시간 유지’가 생산성 향상은 물론, 대량 해고를 막을 수 있고, 저출산 문제를 해결해 더 튼튼한 경제를 지탱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력하고 상식적인 수단으로 통해온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여러 선진국에서 주 4일제가 점진 추진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가 내세운 ‘유연화’ 명분은 ‘노동자 보호’다. 하지만 현행 주 최대 12시간으로 관리되던 단위를 월, 분기, 반기, 1년 등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되면 자연히 가능해지는 것은 ‘불규칙한 장시간 노동’이다. 과로사나 산업재해를 유발하는 대표적 환경이다. 한국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021년 기준 1,915시간이다. 멕시코, 코스타리카, 칠레에 이어 38개국 중 네 번째로 길다. 과로사 부고도 끊이지 않는다. 이렇듯 노동 시간에 대한 국제 기준은 접어 둔 채, ‘노조 재정 투명화’도 강조하고 나선 정부가 이에 대한 미국 등 선진국 사례는 연구한다니 무척 선택적인 선진국 기준 활용법이다.
25일 별세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작가는 생전 “더 이상 ‘난쏘공’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를 꿈꿨다고 한다. 그 시대가 아직은 오지 않았다는 데 모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이 탁월한 노동문학이 300쇄나 찍히고 읽혔는데도, 우리는 노동자 혐오나 노조 혐오가 만연하고, 노동계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정권이 지지율 상승의 반사 이익을 누리는 시대를 산다. 난쏘공이 얼마나 더 읽혀야 우리는 노동자들이 더 이상 이런 문장에 공감하지 않는 시대를 만날까.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노동 개혁을 해내겠다는 당국이 자주 인용하는 독일의 ‘하르츠 개혁’은 사회적 대타협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토록 ‘노동자가 미움 받는 과로 사회’에서 우리는 대타협은커녕 대화라도 온전히 해낼 수 있을까. 풀어야 할 실타래가 무척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