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새벽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된 총 638조7,000억 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을 두고 여야가 줄다리기를 하는 와중에도 각 당의 실세 의원들은 지역구 예산을 꼼꼼하게 챙겼다. 2014년 국회선진화법 시행 이후 '최장 지각 처리'라는 오명에도 막판 심사 과정에서 도로·철도 등 사회간접자본(SOC) 예산 확보 또는 증액을 통해 자신의 지역구에 돈이 돌게 한 것이다. 특히 예산안 심사가 법정 처리시한(12월 2일)보다 3주나 늦어진 탓에 비공식 원내대표협의체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역할을 대신하면서 가능했다. 비공개 진행은 물론 속기록조차 없는 '깜깜이 심사'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면서 언론의 견제 없이 민원성 예산들을 짬짜미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된 것이다.
25일 한국일보가 국회를 통과한 내년도 예산안 수정안을 분석한 결과, 국토교통부 교통시설특별회계(교특),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균특)로 분류되는 도로·철도·공항 관련 예산 중 정부안보다 증액된 것은 65개였다. 증액 규모는 총 2,833억 원으로, 당초 정부 편성 예산(2조4,627억 원)의 11.5% 수준이다. 전체 예산 규모는 정부안보다 3,000억 원가량 줄었는데, 이에 맞먹는 SOC 예산이 지역에 배정된 셈이다.
이 중 7개 사업은 정부 편성 예산안보다 100억 원 이상 늘었다. 당초 예산안엔 없었지만 국회에서 반영된 신규사업도 11개나 된다. 이들 증액 예산 중 상당수는 여야 유력 정치인들에게 돌아갔다. 예결위 소위는 지난 11월 17~29일 8차례 회의를 열었지만 경찰국 예산 삭감 등 '감액 심사'에서 멈췄다. 이후 증액 심사는 회의록조차 없는 여야 '2+2 협의체(원내대표 및 정책위의장)'에서 진행됐고, 이 과정에서 쪽지예산이 오간 것이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수석부대표의 지역구인 경북 김천 예산이 대폭 증액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정부안에는 없었던 김천-구미 국도건설예산(78억9,900만 원)이 신규 반영됐다. 문경-김천 철도도 지난달 말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면서 50억 원짜리 사업이 새로 생겼다. 김천-거제 간 남부내륙철도 예산도 100억 원(1,686억 원→1,786억 원) 늘었다.
대산-당진 고속도로 예산도 80억 원이 배정됐는데, 정부안에는 없다가 지난달 타당성 재조사를 통과하면서 신규 반영됐다. 이는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 지역구 사업이다. 김석기 국민의힘 사무총장의 지역구를 지나는 울산 농소-경주 외동 국도 예산은 당초 173억6,200만 원에서 200억 원으로 증액됐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지역구(충남 공주·부여·청양)도 정부안에 없었던 부여 일반 산업단지 진입도로(45억4,000만 원) 예산이 반영됐다. 국민의힘 소속 정우택 국회부의장 지역구인 청주 상당구에서도 남일-보은 1 국도(81억5,000만 원→116억4,300만 원), 충청내륙고속화도로 1~3공구(합계 1,121억8,500만 원→1,222억1,600만 원) 등의 예산이 증액됐다.
'윤핵관'(윤석열 대통령 측 핵심 관계자)으로 꼽히는 권성동 의원(강원 강릉)은 지역구 내 하수관로 정비사업 예산이 25억 원 늘었다. 장제원 의원(부산 사상)도 노후공단인 사상공단 재정비 예산(545억7,500만 원→566억6,900만 원)이 20억9,400만 원 증액됐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과 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사무총장의 지역구를 연결하는 월곶-판교 복선전철(월판선) 예산은 70억 원 증액(850억 원→920억 원)됐다. 인천발 KTX 예산(632억 원→695억2,000만 원)은 박찬대 민주당 최고위원(인천 연수을) 등이 강하게 요구한 사업이다. 예결위 민주당 간사인 박정 의원(경기 파주을)의 지역구엔 파주 음악 전용 공연장 예산(30억 원)이 배정됐고, 위성곤 민주당 원내정책수석부대표 지역구(제주 서귀포)엔 유기성 폐기물 바이오가스화 시설 예산 62억2,200만 원이 반영됐다. 짬짜미에는 여야가 한마음이었다.
상임위 논의에서 정부가 집행 가능성 등을 고려해 "증액이 어렵다"고 밝힌 사업에 증액이 이뤄지거나, 정부가 일부 증액은 수용했으나 국회에서 증액 규모가 급증한 사업도 있다. 예결위에서 공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아 증액 근거조차 알 수 없는 사업들이다.
충북선 고속화 사업과 관련, 정부는 "정부 예산 87억 원이 반영돼 있는데 예산을 집행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의원들의 증액 요구를 거절했고, 국토위 소위에서도 별다른 의견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예산에는 100억 원이 추가 반영됐다.
정부는 인덕원-동탄 복선전철 사업 예산에 대해서도 "내년 하반기 착공 예정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현재 공사비로도 충분하다"고 밝혔지만, 국회는 정부안(1,103억 원)보다 많은 1,188억 원을 편성했다. 정부가 '수용 곤란' 입장을 밝힌 월판선 예산도 70억 원이 증액됐다.
고령-성주 국가지원지방도 건설 예산은 50억 원 증액(17억 원→67억 원)됐는데, 정부는 당초 "5억 원 증액이 가능하다"고 밝힌 사업이다. 대산-당진 고속도로(80억 원 증액)와 천안 성환-평택 소사 국도(30억 원 증액) 사업 역시 정부가 국토위에서 수용한 예산보다 각각 50억 원, 25억 원 많은 예산이 반영됐다.
반면 국토부가 '224억 원의 증액이 가능하다'고 밝힌 새만금-전주 고속도로, '100억 원 정도면 충분히 집행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힌 신안산선 복선전철 사업의 증액은 이뤄지지 않았다.
의원들이 쪽지 예산을 통해 지역구 예산 챙기기에 급급한 것은 지역 주민들에게 효과적인 홍보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선심성 예산 증액은 총선 공천을 앞둔 해에 더욱 두드러지는데, 재정건전성이나 지역 균형발전 등의 가치는 늘 뒷전이다. '지나친 예산 챙기기' 사례로서 언론의 비판에 오를지언정 자신들에게 표를 행사하는 지역구 주민에게 환심을 사는 것이 우선일 뿐이다.
이번에도 여야 의원들은 지역구 예산 확보 홍보 경쟁에 나서고 있다. 김도읍 국민의힘 의원은 당초 정부안에 없다가 25억 원이 반영된 '하단-녹산 도시철도' 사업을 거론하며 "지역 주요 사업을 국회 예산 심사가 끝나는 시점까지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맺은 결실"이라고 홍보했다. 조해진 국민의힘 의원은 함양-울산 고속도로 예산의 50억 원 증액을 강조하며 "이 사업의 첫 삽을 뜬 인연으로 매년 예산 확보에 공을 들여왔다"고 소개했다.
김교흥 민주당 의원은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청라 연장 예산 증액 등을 소개하면서
"행정안전위원회 간사로 활동 중인 김 의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강조했다. 송기헌 민주당 의원도 "예결위 예산안조정소위 위원으로 활약하며 강원도 주요 현안 예산 확보를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고 홍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