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혼자서만 신나서 하는 연말 이벤트가 있다. 바로, 나만의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일이다. 보통 한 해 읽은 책 가운데 분야를 가리지 않고 열 권 정도를 정한다. 가끔 지인으로부터 ‘네가 버락 오바마나 빌 게이츠도 아니면서’로 시작하는 핀잔을 듣곤 하지만 말이다.
오바마만큼 권력도 없고 게이츠만큼 돈도 없지만, 한국어로 쓰인 책을 고르는 안목은 그들보다 손톱만큼 나을 수도 있겠다는 마음으로 이번에도 올해 읽은 책을 몇 권 추려 보았다. 그 가운데 혼자 읽고 넘어가기에는 아까운 국내 저자의 과학책 두 권이 있어서 한 해가 가기 전에 이 자리에서 공유한다.
2022년에 나온 과학책 가운데 가장 놓치기 아까운 것은 곽민준의 '아주 긴밀한 연결'(생각의힘)이다. 외국의 내로라하는 저자가 쓴 과학책과 비교해도 모든 면에서 뒤처지지 않은 책인데 연초에 출간되면서 제 가치만큼 주목을 받지 못하고 묻혔다. 리처드 도킨스가 1976년에 펴낸 '이기적 유전자' 같은 책보다 지금 시점에서는 훨씬 더 풍성한 정보와 깊이 있는 해석을 담고 있는데도 그랬다.
'대지'의 저자 펄 벅의 안타까운 개인사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유전자-뇌-행동의 비밀을 파헤치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이 책만으로도 유전학, 뇌과학의 기본 지식을 습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폐나 뇌전증 같은 신경 발생 질환 치료에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과학자의 노력도 접할 수 있다. 나아가 '본성이냐 양육이냐'처럼 인간 행동을 둘러싼 오래된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저자가 대학원생이 아니라 유명 대학의 교수 타이틀이라도 달고 있었더라면 좀 더 많은 사람이 이 책의 가치를 알아봤을까. 다행스럽게도 비록 숫자는 적지만 뒤늦게 읽은 여러 독자가 '최고의 과학책'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아직 20대인 저자가 앞으로 또 어떤 책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지 기대된다.
재야의 대가가 특별한 과학책으로 독자를 만난 기분 좋은 일도 있었다. 민태기의 '판타 레이'(사이언스북스) 얘기다. 저자는 지난해 10월 발사된 누리호 로켓 엔진의 핵심 부품 터보 펌프를 개발한 공학자다. 대학이 아닌 기업에서 일하는 저자는 평소 연구하는 틈틈이 과학사를 나름의 시각으로 독학하면서 식견을 쌓아 왔다.
그 결과물이 바로 ‘유체(흐르는 것) 과학’의 역사를 정리한 책 '판타 레이'다. 유체가 불규칙적으로 흐르는 소용돌이(보텍스, vortex)와 같은 난류는 현대 과학이 지금까지도 비밀을 풀지 못한 난제다. 저자는 그 소용돌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학자를 씨줄로 그들이 살았던 사회를 날줄 삼아서 부제처럼 '낭만과 혁명의 유체 과학사'를 완성했다.
곧 크리스마스이니 이 책에서 감동적이었던 대목 하나를 소개하자. '흐르는' 전기에 대한 과학(전자기학)의 기본 틀을 마련한 영국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는 가난해서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다. 이런 패러데이를 과학의 세계로 인도해준 일이 바로 험프리 데이비 같은 과학자의 대중 강연이었다. 유명한 과학자가 된 패러데이는 자기 경험을 염두에 두고서 어린이를 상대로 무료로 ‘크리스마스 강연’을 연다. 양초에 불을 붙이고 빛과 열, 또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과 화학 반응을 이야기한 패러데이의 이 강연은 수많은 어린이를 과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매번 강연 때마다 패러데이가 어린이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다이아몬드가 어둠 속에서 양초처럼 빛을 낼 수 있을까요? 다이아몬드는 양초가 비추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양초는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납니다. 나는 여러분이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양초처럼 스스로 빛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웃에게 빛을 비추는 사람으로 성장하면, 오늘 크리스마스 강연이 참으로 보람찰 것 같습니다.”
과학책 초심자 권유 지수: ★★★★ (별 다섯 개 만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