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간절한 소망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살아 있지 못할 때 가장 두려워지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죽음이 무의미로 종결되는 것이다. 이름이 불리는 대신 사망자 1명으로 계량되는 것, “모두가 죽는다”는 말이 개별적 슬픔을 묵살하는 것, 그가 왔다 갔는데도 세계가 변형되지 않는 것.
딸의 죽음이 무의미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10년째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다. 인도 여성 아샤 데비. 2012년 12월 16일 그의 딸은 달리는 버스에서 집단강간당해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다. 강간을 피해자의 수치로 여기는 인도에선 피해자를 공개적으로 호명할 수 없다. 사람들은 딸에게 니르바야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두려움 없는 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내 딸에겐 이름이 있어요.” 데비는 딸의 이름 - 죠티 싱 - 을 알렸다. 이름을 지우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는 여성폭력과 맞서 싸우는 활동가가 됐다. 낮에는 피해자들을 돕고 밤에는 촛불을 들고 행진한다. 매일 울지만 딸의 고통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딸의 죽음이 다른 모든 딸들을 지켜주기를 빈다. 이제 죠티 싱은 ‘세상을 바꾸는 자’라는 뜻이다.
이란 남성 마지드레자 라흐나바르드는 히잡 시위에 참가했다 체포돼 공개 처형당했다. 그는 유언했다. “울지 말아요. 코란을 읽지 말아요. 기도하지 말아요. 즐겁게 지내요. 행복해지는 음악을 들어요.” 그는 신(神)인 척하는 압제자들에게서 해방되려 싸웠다. 공포에 질린 이란인들이 신의 조작된 권위에 항복한다면, 그래서 과거와 똑같이 괴롭고 불행하다면, 그의 죽음은 무용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살던 대로 살지 말아 달라고 마지막으로 간청한 것이다.
사회적 존재는 숨쉬기를 멈추는 순간 한 번 죽고 남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기를 멈추는 순간 또 한 번 죽는다. 데비와 라흐나바르드가 갈망한 것은 결국 기억이다. 기억됨으로써 다른 의미의 생명을 얻고 각자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다. 죽음 이전으로 세상이 퇴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의 갈망도 같다.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49재에 유가족들이 연 시민 추모제의 이름이다. 유가족들이 조심스럽게 응하는 인터뷰에는 “우리 아이를 기억해 달라”라는 부탁이 빠지지 않는다. “기억하라” 대신 “기억해 달라”고 하는 마음을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지만, “억울한 죽음의 반복을 멈추라”는 애원인 것은 알겠다.
기억해 달라는 말을 “돈을 달라”, “표를 달라”는 말로 듣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순수한 애도만 아주 짧게 하고 잊으라 한다. 기억에 지저분한 혐의를 씌운다. 그럴수록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그들이 겁내는 것은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심판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지금 우리 정부와 사회가 보이는 모습이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어요. 바로잡아야 하고, 바로잡을 겁니다”(딸 유진을 잃은 최정주씨의 말·경향신문). 바로잡기에 보탤 힘이 우리들의 기억하기에 있다. 기억은 다정한 위로이고, 굳건한 약속이며, 용감한 연대이다. 그리고 개혁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