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교 '화상으로 만신창이'··· 백발의 김은숙이 쓴 학폭 비극

입력
2022.12.2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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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새 드라마 '더 글로리'
복수의 주체가 교사, 응징 무대는 교실
한류 이끈 로맨스 드라마 두 기둥의 파격 도전

소녀의 소원은 여름에 반팔 한 번 입어 보는 것이다. 양팔과 다리에 빼곡히 들어선 화상 흉터 탓에 그는 찌는 날에도 늘 긴팔과 긴바지를 입어야 했다. 학창 시절 동급생들에게 당한 학교 폭력이 남긴 끔찍한 후유증이다.

미혼모의 딸로 태어난 소녀는 볕이 제대로 들지 않는 허름한 여인숙에서 '달방' 생활을 했다. 부모 잘 만나 '양지'에서 사는 가해자들에게 곰팡이 취급을 당하던 그는 몸과 마음이 가루처럼 부서져 결국 학교를 떠났다. 세상은 온통 가해자의 편이었다. 몸이 축축해지면 가려워지는 화상 흉터로 팔과 다리를 사정없이 긁던 소녀는 스스로 올라선 죽음의 문턱에서 마음을 고쳐먹는다. 왜 나만 죽어야 하지?


복숭아 같은 누아르

"오늘부터 모든 날이 흉흉할 거야." 30일 오픈에 앞서 국내 언론에 먼저 공개된 넷플릭스 새 드라마 '더 글로리' 1화에서 학폭 피해자 동은을 연기한 송혜교는 피투성이 얼굴로 등장한다. 18년간 복수를 준비한 그가 택한 응징의 첫 무대는 교실. 동은은 선생님이 돼 학폭 가해자를 그의 딸이 다니는 반으로 불러들인다. 교실에서 벌어진 죄는 그곳에서 단죄해야 한다는 서슬 퍼런 의지다. '더 글로리'에서 핏빛 누아르의 주인공이 된 교사(송혜교)와 교실은 서글프고 섬뜩하다.

송혜교 주연, 김은숙 극작의 '더 글로리'의 첫인상은 복숭아 같다. 겉은 부드럽지만 속은 비장함으로 딱딱하게 응결돼 흠칫 놀라게 한다. 송혜교의 바싹 마른 뽀얀 얼굴에 맺힌 살기는 예상보다 시퍼렇다. "죽으면 꼭 천국 가, 사는 동안은 지옥일 테니까" "어떤 증오는 그리움을 닮아서 멈출 수가 없거든". 김 작가는 특유의 감칠맛 나는 대사로 적의를 벼린다. 한류를 이끌었던 K로맨스 드라마의 두 기둥이 그간 보여주지 않은 비장한 표정과 대사는 반전을 무기 삼아 더 날카롭게 박힌다.

김 작가는 뿌연 담배 연기 대신 흑백의 바둑으로 캐릭터의 심리를 부각하며 누아르를 채색한다. 침묵하면서도 수없이 반복되는 맹렬한 전투. 스릴러의 관조적 연출('비밀의 숲'·2017)로 정평이 난 안길호 감독은 요란하지 않게 긴장을 쌓는다. 가정 폭력에서 벗어나려 동은과 손을 잡은 현남(염혜란) 등을 통해 비장한 상황에서 틈틈이 가벼운 웃음으로 긴장을 풀어가는 김 작가의 코믹 릴리프(comic relief)는 시종일관 비장한 장르물의 피로를 덜어줄 '보급형 누아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더 글로리'는 폭력 피해자들의 연대로 복수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박찬욱 감독과 이영애 주연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와 닮았다. 다만 연대의 계기에 설득력이 떨어져 아쉽다. 살을 에는 듯한 학폭 장면이 극 초반 적나라하게 묘사된 것도 시청자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


'로코 장인'에 갑자기 펼쳐진 '현실 지옥'

'파리의 연인'(2004)부터 '시크릿가든'(2010), '도깨비', '태양의 후예'(2016) 그리고 '미스터 션샤인'(2018)까지. 달콤하고 찬란한 사랑을 얘기했던 김 작가는 왜 갑자기 학폭을 소재로 드라마를 꾸렸을까. 20일 서울 종로구 소재 호텔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김 작가는 "고2가 되는 딸의 학부모로 학폭은 늘 가까운 화두였다"고 말했다. "딸내미가 '엄마는 내가 죽도록 때리면 가슴이 아플 것 같아, 죽도록 맞고 오면 가슴이 더 아플 것 같아?'라고 묻는 데 너무 충격이었고, 지옥 같은 순간이었다"는 게 그의 말. 그 짧은 순간, 김 작가의 머릿속엔 많은 이야기가 펼쳐졌다. 작가는 바로 작업실로 향했다.

김 작가는 학폭 피해자를 만나고, 그들의 글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는 "그들이 바라는 건 현실적인 보상이 아닌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였다"며 "왜 현실적인 보상이 아닌 사과를 받고 싶을까 고민하다가 폭력의 순간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과 명예, 영광을 되찾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 세상의 동은을 응원하고 싶었다"는 김 작가는 드라마의 제목을 '더 글로리'로 지었다. 그는 "피해자분들이 가장 많이 듣고 상처받는 말이 '너는 아무 잘못이 없어?'라는 말이더라"며 "그래서 그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사명처럼 이해시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했다"는 얘기도 보탰다. 이날 김 작가의 머리는 온통 백발이었다. 올해로 만 49세. 염색도 포기한 채 "총을 쓰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복수를 해야 될까를 생각하며 다른 작품 때보다 두 배로 노력"하면서 대본 작업에 몰두했다.


"장르물 도전이 꿈"이었다는 송혜교

송혜교에게도 '더 글로리'는 고난의 여정이었다. 그는 학폭 가해자인 연진(임지연)에게 뺨을 맞는 장면을 찍은 뒤 "머릿속이 하얘져" 잠시 촬영을 잇지 못했다. "장르물에 도전하는 게 꿈"이었다는 그는 동은의 단단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송혜교는 "연기를 불쌍하게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며 "'너희들을 벌 줄 수 있어'란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총 16부로 제작된 '더 글로리'는 파트1(8회)이 30일에, 파트2는 내년 3월에 공개된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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