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남북통일 '평화의 다리' 역할 할 때… 경제교류도 질적 수준 높여야"

입력
2022.12.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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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수교 30주년, 현인들에게 길을 묻다

편집자주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 역사는 그 어떤 나라보다 드라마틱하다. 한때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으로 적대국이었던 시절을 지나, 1992년 정상 수교를 다시 맺을 때만 해도 양국은 서로를 멀찍이 쳐다보는 사이였다. 그러나 수교 30주년이 된 올해, 양국 관계는 최고 단계인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수직 상승했다.

동맹에 버금가는 양국의 우호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가 필요했기에 가능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은 저렴한 노동력과 대규모 공장 지대가 필요했고, 베트남은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당장 인민들의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했다. 그 결과 수교 당시 5억 달러에 불과했던 양국 교역은 올해 900억 달러 돌파를 바라보고 있다. 30년 새 18배가량 성장한 것으로, 양국은 2025년 이전에 1,000억 달러 돌파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깊어지는 경제 교류 이면에는 복잡한 갈등도 존재한다. 21일 베트남 외교아카데미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는 23만 명의 베트남인이, 베트남에는 15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오늘도 인권과 비자 이슈 등 수많은 구조적 문제에 노출돼 있다. 그동안 양적인 경제성장에만 집착해 국민들의 실제 삶을 후순위로 미룬 결과다. 또한 양국은 북한이라는 중요 교집합이 있음에도, 민감한 문제라는 이유로 애써 그 존재를 무시해오기도 했다.

서로를 가장 필요하지만 진심까진 통하지 못한 관계. 이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국은 올해 전직 대사와 학자들로 구성된 '현인그룹'을 출범시켰다. 이에 한국일보는 양국 현인그룹 대표인 응우옌푸빈 초대 주한 베트남 대사와 이혁 전 주베트남 한국 대사를 통해 양국의 과거 30년과 미래 30년을 분석하고 조망한다. 현인그룹의 최종 논의 결과는 양국 정부에 정식 상정돼 금명간 구체적인 정책으로 발현될 예정이다.



"한-베트남 미래 30년, 북한 문제 해결이 최대 화두"

현인그룹은 양국 미래 30년의 최대 화두로 '남북통일을 위한 베트남의 중재국 역할'을 꼽았다.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은 북한과 정상 수교를 맺은 몇 안 되는 국가로, 양국은 최근까지도 외교인력 교류와 경제활동 보장 등 우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실제로 베트남 외교부 내에는 '북한 유학파'가 주류로 활동 중이며, 베트남 대도시엔 북한 식당이 정상 영업하며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1970년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주북한 베트남 대사관에서도 9년 동안 근무했던 응우옌푸빈 현인그룹 베트남 측 대표는 "베트남은 현재 북한이 외교 정책과 관련해 가장 신뢰하는 파트너국"이라며 "한국과 강화된 관계 속에서 북한과의 우호도 손상시키지 않으며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가 베트남"이라고 밝혔다.

한국 현인그룹도 '베트남-북한'의 외교 특수성을 인정했다. 그리고 한국 측은 △베트남식 개방경제 북한 도입 유도 △북한 미사일 및 핵위협 중재 등 구체적 로드맵도 제시했다.

이혁 현인그룹 한국 측 대표는 "한반도 통일을 위해 베트남은 가장 먼저 북한 공무원을 초청해 베트남식 개혁개방 경험을 공유하는 프로그램을 개설해야 한다"며 "핵무기 없이 개혁개방만으로 중견국 위치에 오르고 있는 베트남을 이해해야 북한도 비핵화 대화 과정에 적극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베트남 측은 한국의 로드맵에 원론적 동의를 하면서도 직접적으로 북핵을 언급하는 것에는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개혁개방 경험 공유와 달리, 북핵 문제는 북한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슈이기 때문이다. 푸빈 대표는 "남북 협상과 중재에는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고 전제한 뒤 "수교 30주년을 맞아 베트남이 남북관계에 '평화의 다리'가 될 의지가 생긴 만큼 양국 정부는 함께 (북핵 문제를 포함한) 장기적 평화 프로세스 구축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베트남 외교가 고위 관계자는 "베트남은 현재 유엔 등에서 '국제법을 준수하는 정상국가' 이미지를 만드는 데 전력 투구를 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는 이 같은 외교 기류를 적극 활용, 베트남을 지렛대 삼아 북한을 국제무대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적극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다자 협력' 강화는 '필수'… 양국 안보 이익도 따라온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상대방이 필요한 것을 내놔야' 하는 세상의 이치는 외교관계에서도 다를 바 없다. '남북통일 중재 역할'에 동의하는 베트남이 현재 한국에 요구하는 건 '동남아 다자 외교관계에서의 한국 측 지원'이다.

푸빈 대표는 "한국은 한반도 평화에, 베트남은 남중국해 주권에 대한 안보 수요가 있다"며 "특히 베트남은 남중국해 문제에 있어 동반자인 한국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 역시 우리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당부했다. 그는 "국방·안보 협력이 선순환을 이루면 결국 경제 등 다른 파트너십도 발전한다"며 "현인그룹은 이에 '외교-국방장관 2+2 협의 정례화'를 통한 국방안보 협의 업그레이드를 양국 정부에 건의했다"고 밝혔다.

한국의 다자외교 강화는 양국 방위산업 교류에도 긍정적 요소가 될 것이란 전망도 제기됐다. 한국만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노후 러시아산 무기 교체를 검토 중인 베트남이 자연히 한국 방위물품을 구매할 것이란 논리다.

푸빈 대표는 "방산 상위 10개국에 드는 한국의 역량은 국방 기술 개발과 이전이 필요한 베트남과 주요 접점 중 하나가 될 것"이라며 "남북통일과 다자외교, 방산 교류는 별개가 아닌 연결된 이슈임을 양국 정부는 인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양적' 경제 교역 넘어 인문학 교류 시대로 가자"

현인그룹은 지난 30년 양국 관계를 이끌어 온 경제 교역의 방법론적 변화도 주문했다. 이미 9,000여 한국기업이 현지에 진출한 상황에서 더 이상 양적 교역 확충에만 집중할 이유가 적어졌다는 논리다.

실제로 글로벌 공급망 관점에서 한국은 '탈중국' 글로벌 기업들의 이전 1순위 국가로 성장한 베트남에서 향후 상당한 경쟁을 감수해야 한다. 베트남 역시 넘치는 조립 공장 대신 고부가가치 산업 발전을 희망하고 있다.

양국 모두 '질적 성장으로의 진화'를 원하고 있으나 세부 요구사안은 결이 조금 다르다. 이 대표는 "한국기업 진출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도록 베트남 정부는 추가 인센티브 지급을 포함, 국가 운영능력을 증진해 투자 환경을 좀 더 예측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푸빈 대표는 "북남부에 집중된 한국기업 진출이 정보기술(IT) 산업 중심 개발이 이뤄지는 중부 지역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며 "교역량만 늘릴 게 아니라 녹색경제 공동 추진 등 새로운 성장 틀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현인그룹은 양국의 부족한 인문학적 교류를 강화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베트남인이 한류를 사랑하고 한국인이 베트남을 주요 휴양지로 찾는 것에 안주하지 말고 일상생활에서의 정서적 이해를 높여야 한다는 취지다. 이들은 그 해결책으로 "양국에 한국학과 베트남학에 대한 연구 및 보급을 늘리고 정부 운영 문화교류 센터를 확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푸빈 대표는 "같은 유교국가지만 열대 기후에 사는 베트남인은 한국인에 비해 개방적이고 외부 교류에 익숙하다"며 "더 원칙적이고 엄격한 성격의 한국인이 이런 베트남인의 특성을 잘 이해하는 것은 미래 양국 관계의 핵심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 역시 "국민 간 교류가 활발히 이뤄져 우호적 분위기가 고조되어야 지속가능한 동반성장이 가능하다"며 "베트남인이 한국인을 더 공부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노이= 정재호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