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박모(28)씨가 '빌라왕'의 덫에 걸린 건 지난해 2월이다. 서울 광화문에서 근무하는 박씨는 부동산 중개 플랫폼을 통해 지하철 5호선 라인에 위치한 강서구 화곡동 일대 저렴한 빌라 전세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수상쩍은 점이 있었다. 살기 괜찮다 싶은 깔끔한 신축 빌라들 소개글에 "이사 지원금을 준다"는 광고 문구가 따라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지원금이 전세사기의 미끼일 수 있겠다 싶어, 박씨는 일부러 지원금을 주지 않는 매물만 찾았다. 그러던 중 매물 상담을 하다 알게 된 한 공인중개사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그 말에 의심을 푼 박씨는 입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다음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지난해 2월 말 한날한시에 부동산 사무실에서 건축주 대리인과 새 집주인 김모(42) 씨 사이에 매매계약이 이뤄졌고, 박씨와 집주인(김씨)도 그 자리에서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 계약서 특약에도 '임차인(박씨)이 전세보증보험에 가입하는데 집주인이 적극 협조한다'는 문구까지 넣었으니 안심이었다.
이후 박씨는 올해 1월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전세보증보험을 신청했고, HUG로부터 가입 불가 통보를 받았다. "집에 압류가 걸려 있어 보험 가입 진행이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박씨는 자신이 사는 빌라 두 동 28가구 중 26가구가 김씨 소유였고, 전셋집에 압류가 잡힌 게 자신뿐이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집에 압류가 걸려도 세입자에게는 별도 통보가 가지 않고, 등기부등본을 떼 봐야만 알 수 있다.
집주인 김씨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보증금 2억7,000만 원에 웃돈을 얹어 집을 사가세요"라는 황당한 답이 돌아왔다. "국세에 대한 압류, HUG의 가압류에 대해 각각 2,000만 원씩 총 4,000만 원을 추가로 내고 집을 사가라"는 얘기였다. 박씨는 올해 9월 말 김씨를 찾아가 집값을 깎아달라 사정했지만, 김씨는 "돈 있을 때 다시 찾아오라"며 자리를 떴다.
얼마 후 박씨는 집주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주인 김씨는 바로 전국에 1,139채의 집을 남기고 급사한 '빌라왕'이었다. 박씨는 "이제 이 집에 발이 묶여 이사도 가지 못한 상황인데 전세금 대출 금리는 계속 오르고 있다"며 "이자 비용만 100만 원이 넘을 것 같다"고 한탄했다.
박씨 같은 빌라왕 피해자들이 가장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이 과정에서 어떠한 경고나 제동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씨는 거액의 국세를 체납하고, 보증보험 사고를 일으키면서도, 멀쩡하게 추가로 빌라를 사들이고 임대차 계약을 체결했다.
김씨가 2년에 걸쳐 1,139채의 집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위험의 단서는 여러 차례 노출됐다. 김학용 국민의힘 의원실이 HUG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김씨가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사고는 2020년 3건(보증금 6억 원), 지난해 3건(8억 원)이었다가, 올해 165건(320억 원)으로 폭증했다.
HUG는 △임대인 대신 보증금을 갚는 대위변제가 3건 이상이고 △대위변제 후 임대인으로부터 보증금을 회수하지 못한 금액이 2억 원 이상이면, 해당 임대인을 블랙리스트(집중관리 다주택 채무자)에 올린다. 김씨가 HUG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건 올해 초쯤이다. 보증금 사고를 여러 건 낸 상황임에도, HUG 자체 기준에 미달한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가 뒤늦게 작동했다. HUG 관계자는 "집중관리 다주택 채무자 관리 제도가 2020년 4월에 시행돼 김씨가 누락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씨가 세금을 납부할 의지가 없었다는 점이 임차인이나 HUG에 공유되지 않은 것도 맹점이다. HUG는 임대인이 보증보험에 가입하면 세금완납증명서를 제출하도록 하지만, 임차인이 가입할 때에는 HUG의 구상권만 점검하고 세금 체납 내용은 별도로 조사하지 않는다.
현재 전세보증보험에 가입하고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피해 금액은 300억 원대지만, 박씨처럼 보험에 가입조차 하지 못한 임차인들까지 따지면 피해 금액은 더 커진다. 김씨 소유 주택의 평균 보증금이 2억 원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1,139채 보증금 규모는 2,000억 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보인다.
김씨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구제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보증보험에 가입한 임차인들은 보증 이행을 위해 집주인에게 임대차계약 해지 통보를 해야 하지만, 김씨 유족들 중 상속인이 결정되지 않아 이 절차부터가 불가능하다. 현재 김씨 부모는 한정승인(상속 재산 안에서만 채무 변제)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지만, 직접 법원에 한정승인을 신고하고 김씨 소유 주택에 상속등기를 하는 절차가 남아 있다. 엄정숙 법도 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는 "한정승인은 법원에서 자산 부채 규모 계약관계를 따지는 과정이 오래 걸려, 통상 6개월에서 1년이 소요된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보증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임차인의 경우 직접 경매를 진행해야 하는 과정에서도 난항이 예상된다. 특히 임차인들이 김씨 명의의 집을 낙찰받으려면 김씨 앞으로 된 조세채권과 당해세(해당 부동산 자체에 부과된 세금)까지 납부해야 한다. 피해자 박씨 역시 김씨 앞으로 된 조세채권 2억5,000만 원 때문에 경매를 신청하지 못하고 있다. 박씨는 "임차인 한 사람이 조세채권 전부를 갚을 수 없어, 피해자 40여 명이 모여 이 돈을 나눠내는 제3자 납입까지 강구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제도 개선이 늦어지는 것도 피해를 키우는 요인이다. 기획재정부가 9월 전세사기 대책의 일환으로 경매 시점에 내야 할 당해세의 법정기일이 전세 확정일자보다 뒤일 경우, 임차보증금을 우선 변제하도록 하는 국세기본법 개정안을 냈지만, 아직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통과된다 해도 시행일이 내년 4월부터라 빌라왕 피해자들이 구제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여기에 더해 임차인이 낸 전세보증금이 애초에 적정 가치보다 더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큰 데다, 현재 집값이 하락하고 있어 경매 이후 임차인이 손에 쥐는 돈은 적을 것으로 보인다.
무자본 투기 세력이 주택을 무한정 매집할 수 없도록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현재 정부는 2주택자, 20주택자, 200주택자 모두를 하나의 다주택자로 보고 정책을 펴지만 이들 모두가 다 같은 다주택자가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김 교수는 "일정 수 이상의 주택을 매입하는 사람들의 세금 체납 내역 등을 기반으로 신고제나 허가제를 운영했으면, 지금처럼 전세사기가 기승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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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빌라왕 정체는 '검증된 바지'... 마이바흐에 50돈 금도장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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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섭섭지 않게 챙겨 줄게요"…전세사기 '동시진행' 다시 판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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