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봄' 발원지인 튀니지에 또다시 정치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의회 기능을 무력화하며 독재 권력을 강화하려는 대통령에, 국민들은 '투표 거부'로 야권은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며 맞서고 있어서다. 2019년 집권한 카이스 사이에드 튀니지 대통령이 퇴진을 거부할 경우, 정국 혼란은 장기화할 전망이다.
17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튀니지 '선거관리 당국(ISIE)'은 이날 치러진 총선 투표율이 8.8%로 잠정 집계됐다고 밝혔다. 2010년 아랍권 민주화 시위인 ‘아랍의 봄’ 이후 민주주의가 정착된 튀니지에서 이뤄진 선거 중 가장 저조한 투표율이다.
영국 가디언은 "이는 내란이 진행 중인 아이티(2015년 18%)와 아프가니스탄(2019년 19%)보다도 낮은 수치"라며 "현대 역사상 아마도 가장 낮은 투표율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선거에선 총 161개의 의석을 놓고 1,058명의 입후보자들이 경쟁했다. 그러나 ISIE 관계자는 “1,800명의 유권자가 등록된 수도 튀니스의 카바리아 지역에선 단 100명만 투표했다”며 “이들은 선거가 정치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본다”고 전했다.
총선 투표율이 이렇게 낮은 것은 사이에드 대통령의 독재 행보에 국민들이 선거를 보이콧했기 때문이라고 현지 언론은 분석했다. 이번 총선은 사이에드 대통령의 권력을 대폭 강화한 올 7월 개헌 이후 처음 치러진 선거다. 당시 개헌안은 2014년 제정된 헌법에 명시된 의원내각제 성격의 대통령제를 완전히 뒤엎는 내용이어서 튀니지 정치권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셌다.
실제 새 헌법에선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권 △군 통수권 △판사 임명권 등을 부여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사실상 대통령이 입법부와 행정부, 사법부에 걸쳐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의회는 별도의 독립된 권력기관이 아닌 대통령의 업무를 지원하는 기구로 역할이 축소됐고, 사이에드 대통령의 임기(2024년 5월) 안에 '임박한 위험'이 닥칠 경우 대통령이 임의로 임기를 연장할 수도 있게 했다. 사이드 대통령이 장기 독재 체제 구축에 나섰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야권은 즉시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다. 야당 연합체 '전국 구원 전선'은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사이에드를 불법적인 대통령으로 간주할 것"이라며 “(사이에드 대통령은) 조속한 시일 내에 대선을 다시 치르고, 국민과 대화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랍의 봄 시위로 실각한 독재자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자유헌법당도 대통령 퇴진 촉구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지난 2019년 민주적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사이에드 대통령은 야권의 퇴진 요구에 대해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가 퇴진을 거부할 경우 반정부 시위가 촉발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전국 구원 전선 등 야권 연합은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와 연좌 농성을 열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