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시장, "바보" 한마디에 '징역'…에르도안 '꼼수'로 정적 제거

입력
2022.12.1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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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 공무원 모욕' 혐의 적용
단일 후보 내세우려던 야권 연합 곤혹
"튀르키예에 정의 없다" 대규모 항의 시위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 시장이 "바보" 한마디를 했다는 이유로 법원으로부터 징역형을 선고받고 정치 활동 금지를 당했다. 판결 자체도 논란이지만, 이 사람이 야권 유력 대선 후보라는 점에서 국내외 비판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20년째 장기 집권 중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배후에 있다는 의심도 커지고 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여러 차례 정적을 제거해 왔다.

'에르도안 대항마'로 떠오르자 탄압

14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일간 후리예트에 따르면 이스탄불 법원은 '공무원 모욕' 혐의로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에게 2년 7개월의 징역형과 정치 활동 금지를 선고했다. 이마모을루 시장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대항마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마모을루 시장은 항소를 한다는 방침이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그를 포함해 에르도안 대통령의 여러 정적이 법원 판결로 정치 무대에서 퇴장당했기 때문이다. 튀르키예 사법부가 사실상 정부에 예속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그가 '바보'라는 말을 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이마모을루 시장은 2019년 6월 이스탄불 시장 재선거에서 승리한 뒤 "(2019년) 3월 31일 치른 지방선거를 무효화한 사람은 바보"라고 말했다. 그가 3개월 전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집권 여당과 정부가 부정선거를 주장해 재선거를 치르게 되자, 이를 비판한 말이다.

튀르키예 사정당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공무원 모욕' 혐의를 적용해 그를 재판에 넘겼다. 선거를 무효시킨 '선거관리위원회 공무원'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가 '바보'라고 부른 대상은 선관위가 아닌 쉴레이만 소일루 내무부 장관이었다. 소일루 장관이 그를 겨냥해 "재선거에 불평하는 사람은 바보"라고 공격하자 그가 재선거 뒤, 소일루 장관의 말을 인용해 반박했기 때문이다. 재선거 결과 이마모을루 시장은 여당 후보보다 77만 표 더 많이 받는 대승을 거뒀다.

이마모을루 시장은 원래 구청장 경력밖에 없는 무명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이스탄불에서 시장으로 당선되면서 단박에 야권 유력 대선 후보로 부상했다. AFP 통신은 정치 경력이 일천한 그가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승리한 배경에는 반(反)에르도안 물결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에르도안 정권하에서 사회가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로 후퇴하고, 경제위기도 깊어지자 정권 교체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것이다.

유력 야권 후보 발목…"정치적으로 계산된 공격"

법원의 황당한 판결에 이마모을루 시장의 지지자들은 이날 이스탄불 법원 앞에 모여 재판 결과에 항의했다. 이들은 "정부는 물러나라"고 외치며 "튀르키예에 정의가 없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반발했다. 이마모을루 시장도 "(판결은) 국정 운영자들의 주요 목적이 정의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증거"라며 "튀르키예가 침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판결을 내렸다"고 배후를 지목했다.

내년 대선에 이마모을루 시장을 단독 후보로 내보내려던 공화인민당(CHP) 포함 6개당 야권 연합은 난관에 부딪혔다. 이마모을루 시장은 다음 대선의 야권 후보로 가장 지지도가 높은 유력 후보였다. BBC방송은 "항소를 하면 시장직은 유지하겠지만, 대선 후보로는 실격할 수 있다"며 "야권이 에르도안에 맞설 후보를 찾기 어려워졌다"고 짚었다.

결국 에르도안 대통령의 꼼수가 이번에도 통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올해 초에도 CHP의 핵심 정치인 카난 카프탄치오글루가 '대통령 모욕죄'로 4년 11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2014년부터 지난달까지 대통령 모욕죄로 수사받은 사람은 4만4,000명이 넘는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판결은) 이마모을루 시장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국민들의 투표권을 제한했다"며 "정치적으로 계산된 부당한 공격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장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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