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은 조직적으로 선거 댓글을 조작해 원세훈 전 원장이 사법처리됐다. 이어 문재인 정부에선 남재준·이병기·이병호 전 국정원장들이 특활비 상납 등으로 줄줄이 처벌을 받았고 국내정보 활동 금지, 대공수사권 경찰 이관 등 국정원 개혁 조치도 이뤄졌다. 하지만 국정원장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자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탈북어민 강제 북송 사건으로 서훈·박지원 전 원장이 수사를 받고 있다. 국가안보의 최첨병인 국정원은 언제까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사선상에 올라야 하는 걸까.
국정원 출신으로서 한국 정보기관 선진화를 위한 소명감으로 국가정보포럼을 설립해 활동하는 석재왕 건국대 안보·재난관리학과 교수를 12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그는 “국정원의 실패는 결국 최종 정보소비자인 대통령의 정치화 탓”이라고 지적하며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국정원을 운영·통제할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보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고도 국가안보를 지킬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던 미 상원 정보위원회의 언명이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하다고 그는 말했다.
-국정원이 수사대상이 된 적이 있었으나 이번엔 국정원이 직접 전직 원장들을 고발하기까지 했다. 국정원 내부에 인식 격차나 분열이 심각하다는 뜻 아닌가.
“물론 국정원 내부에 정보 수사 공작 분석 등 부서에 따라 인식이 다를 수 있고 문재인 정부가 남북화해에 방점을 두고 정책을 추진하면서 (대공라인의) 반발도 있겠다. 그러나 전 원장을 고발하는 그런 일은 국정원 내부 분열의 표출이라기보다 정무직이 주도하는 일로 봐야 할 것이다. 대선 과정에서, 또 선거 후 승자독식으로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갈등의 한 단면이라고 하겠다. 정권이 진영논리에 따라 인적 청산을 단행하면서 갈등이 나타나는 것인데, 결국 정치가 직원과 조직을 사분오열시키는 것이다. 인적 청산이 필요할 때도 있겠으나 과하면 구성원들이 업무에 몰입할 수 없고 정보역량이 약화되는 건 당연하다.”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국정원 1급 간부 전원이 퇴직하고 2, 3급은 100여 명이 보직 없이 사실상 대기발령이 나는 등 대규모 인사 물갈이가 논란이 됐다.
“정권교체 때마다 반복된 일이다. 길게 보면 1980년대 신군부가 들어섰을 때 조직이 와해될 위기라고 할 만큼 대량 해직이 있었고,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였던 김대중 정부 때도 500명 이상 해직됐다. 물론 전례가 있다고 해서 괜찮다는 건 아니다. 조직의 발전은 업무 연속성, 직원의 자긍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감안해서 인사를 해야 한다. 아마 2, 3급은 교육 등을 거쳐 다시 복귀할 것으로 생각한다.
인사와 관련한 다른 문제도 있다. 전 정부에선 합당했던 활동에 대해 다음 정부에서 이념적으로 달리 해석해 억울한 징계를 당하는 경우다. 직원들이 억울하게 강등·파면 등을 당해도 제도적으로 하소연할 데가 없다. 국정원은 노조도 없고 행정소송을 제기하려면 국정원장 허락을 받아야 하는 규정이 있어 구제가 안 된다. 행정소송은 할 수 있게 풀어줘야 한다. 직원 인권이 너무 불리하게 기울어져 있다.”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탈북어민 북송 사건이 수사 대상이 되고 국정원과 통일부 등이 입장을 뒤집었는데, 정보기관이 정권에 따라 이렇게 휘둘려도 되나. 서해 사건은 당시에도 비판이 있었지만 북송 사건은 국민의힘에서도 별 이견이 없었는데.
“전자는 우리 국민이 피살된 사건이라 분명 후자와 다르다. 내국인과 관련해선 인권에 더 예민하기 마련이다. 만약 보도된 것처럼 전직 원장들이 첩보 삭제를 지시하거나 정보를 은폐하려 외교부 장관을 배제한 게 사실이라면 고발하고 수사할 사안 아닌가. 반면 법원에서 무죄 판단이 나온다면 정치적 논쟁거리로 남을 것이다. 명확한 판단은 최종 법원 판결이 나와야 가능하다.
문제는 우리 시스템이 국가안보실장과 국정원장이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정보를 자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 일선 직원들은 정보를 진짜 몰랐던 듯하다. 투명하지 않으면 불법과 일탈을 저지를 여지가 많다. 이스라엘의 경우 정보기관 모사드가 암살 리스트를 작성하면 외교부, 경찰청, 국내 정보기관 신베트, 군 정보기관 아만이 다 모여 총리 주도하에 회의를 연다. 외교적 문제, 국내 갈등 요인 등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대안을 마련한 후 최종 암살 리스트를 결정한다. 극비 사항인 암살 공작도 이렇게 공유하고 협업을 한다. 이런 식이면 정보를 쥐고 일탈할 수 있겠나.”
-국정원이 시행규칙 개정으로 대통령의 신원조회 요청권을 신설하면서 국내정보 수집이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신원조회는 3급 이상 공무원을 대상으로 본인 동의하에 검증하는 거라 정보수집이나 불법사찰과는 거리가 멀다. 과거 정보관(IO)들이 했던 국내정보 활동은 정책결정이나 대통령 통치권 보장을 위해 정치인 공무원 언론인 등 대상을 망라해 상시적으로 기관에 출입하며 정보를 수집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우려가 나온다는 것은 국정원에 대한 불신이 높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우려해야 할 것은, 신원조회가 다양한 인재를 발굴하기 위한 객관적 검증 수단이 아니라 정권 코드 즉 충성도와 이념성을 검증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다.”
-국정원에 대한 불신이 남아있는 게 사실이다. 무리한 간첩 수사, 선거개입이 그리 먼 과거 일이 아니지 않나. 국정원 활동에 대한 평가와 감시가 더 투명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전적으로 동의한다. 비밀정보기관은 행정부처보다 통제가 미약해 일탈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핵심은 국정원장에 대한 통제 강화다. 정권의 국정 어젠다를 실행하는 정무직을 통제해야 한다. 전직 원장 2명이 고발된 일도 이런 통제와 감시의 필요성을 말해준다. 과거 국정원은 대통령, 원장이 지시하면 내 몸 희생해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문화가 있었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선거댓글 조작 사건으로 수십 명이 수사받고 구속되면서 일선 직원들에겐 불법적 활동을 하겠다는 마인드가 없어졌고 2020년 12월 국정원법 전면 개정 후 정치개입은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실무진 통제보다 중요한 게 원장에 대한 통제다.”
-어떻게 통제해야 하나.
“최종 정보소비자인 대통령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이고 대통령은 최종 인사권자이며 고급 정보를 보고받는다. 대통령이 정보기관 발전과 통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미국은 대통령이 취임하면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중앙정보국(CIA)을 방문할 만큼 정보기관을 중시한다. 그러면서도 대통령 직속 각종 위원회가 있어서 첩보를 평가하고 정보기관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과거 CIA가 대북 위협을 과소평가한다고 지적해 분석 방향을 바꾸게 한 것도 이런 위원회 중 하나였다. 위원회 외에 대통령이 임명하는 독립 감사관과 의회가 중층적으로 정보기관을 감시한다. 독립 감사관은 정보기관장이 반대해도 감사를 할 수 있다. 의회는 대통령이 제한하지 않는 한 정보접근이 가능하고 의회의 감사는 아무도 중단할 수 없다. 호주 안보정보원(ASIO)은 홈페이지에 120쪽이나 되는 감사보고서를 공개하고 감사부서의 전화번호와 이메일도 적어서 의견이 있으면 달라고 한다.
한국은 국정원장 혼자 뭐든지 할 수 있는 구조다. 규정개정 인사 감찰 다 원장 한마디면 일사천리다. 다른 부처나 기관처럼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 같은 게 없다. 대통령 모르게 불법과 일탈을 저지르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기에 대통령이 국정원을 투명하게 운영하고 통제하는 것이 대통령에게도 유익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국회 정보위가 있지만 국정원이 기밀이라며 정보를 제한하면 그만이고 감사 중단도 요청할 수 있다. 국회 정보위원들의 전문성도 떨어진다. 많은 선진국들처럼 정보기관 통제·감시를 강화해야 한다.”
-결국 대통령 스스로 정보기관을 사유화해 정권유지 수단으로 삼았던 악습을 버려야 한다는 말인데.
“그렇다. 정보기관 실패의 상당 부분은 정보사용자의 과도한 정치화에 있다. 정보기관을 정권유지 수단으로 써온 것은 여야가 공히 그랬다. 집권해서 정보기관으로부터 국내정보를 보고받아 보면 달콤하니까 유혹에 빠진다. DJ는 자신을 납치하고 고문했던 안기부를 안아주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초반에는 국정원을 무시하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의존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선거댓글 사건 등을 보고 각성을 많이 했는지 집권 후 국내정보 수집 기능과 대공수사권을 없앴다. 미국 정보기관도 과거 정치사찰과 공작을 많이 했었다. 1976년에 상원 정보위원회를 만들면서 ‘정보기관이 국민의 시민적 자유와 사생활 침해를 하지 않고도 미국 안보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표명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2024년 경찰에 이관되는데 경찰이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있다. 원칙적으로 국정원의 정보-수사 기능 분리는 왜 필요한가. 해외 정보기관들과 비교한다면.
“선진국들이 국내정보, 해외정보, 수사정보를 모두 분리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한 기관이 너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으면 인권침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미국 영국 독일 캐나다 이탈리아 호주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 헝가리 등은 세 가지를 완전히 분리하고 있다. 정보기관의 프리미어리그라 할 만하다. 그 밑에 국내·해외정보는 통합하고 수사만 분리한 불가리아 인도 인도네시아 대만 등이 있다. 러시아 이집트 말레이시아 필리핀은 국내정보와 수사가 통합돼 있고,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예멘 등은 국내·해외정보와 수사가 완전히 통합돼 있다. 우리나라는 문재인 정부 들어서야 수사를 분리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런 흐름을 되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간첩을 어떻게 잡느냐가 과제로 남아있다.”
-경찰이 검찰로부터 넘겨받은 수사 업무가 많고 대공 수사역량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첫 번째 대안은 정보수사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즉 경찰청 안보수사국을 독립된 국가수사본부(가칭)로 확장하는 안이다. 소속은 경찰이지만 국정원 직원이 함께 근무하며 협업하는 방식이다. 미 국가정찰국(NRO)이 국방부 산하지만 국가안보국(NSA) CIA 연방수사국(FBI) 등에 실시간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가정보기관으로 격상시키면 경찰청 산하라도 경찰청장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선진국은 민간, 군, 행정부처 등이 참여하는 이런 정보공동체·정보협의체를 다수 운영한다.
두 번째 대안은 FBI처럼 국가안보수사청을 법무부 산하에 만드는 것이다. 2020년 국정원법 개정 때 활발히 논의되고 거의 합의됐던 안이다. 경찰이 권력의 압박에 약하고 대공수사를 천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독립 외청으로 두자는 것이다. 국정원 경찰 검찰 출신을 두루 채용해서 규모 있게 만들면 된다. 두가지 대안 모두 국정원 수사역량을 흡수하면서 비밀성은 약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정보화와 세계화가 심화하는 동시에 경제안보가 중시되는 시대다. 국정원이 어떤 비전을 갖고 변화해야 하나.
“위에서 언급한 대통령의 지원과 통제가 가장 중요하다. 두 가지 더 꼽는다면 우선 정보활동 법제화다. ASIO는 관련 법령이 280여 쪽에 이르는데 우리나라는 10쪽이 안 되는 수준이다. 보완하고 바꿔야 할 것투성이다. 예컨대 형법 98조는 ‘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만 처벌하도록 규정해 적국인 북한 외 다른 나라를 위해 일하는 스파이는 처벌할 수가 없다. 산업기밀을 노리는 각국의 스파이들이 많은데 정작 외국인 간첩은 추방하고 협조한 내국인만 처벌할 수 있다. 이러니 한국을 자기네 집 앞마당으로 생각한다.
또 하나는 국가정보공유협의체 설립이다. 정보기관 행정부처 군정보기관 경찰 등이 정보를 공유해 협업하고, 제공된 정보가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평가해야 한다. 선진국에는 다 있다. 비밀은, 알려지면 업무 수행을 못할까 봐 유지하는 것이지 비밀 유지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 않은가. 기관들이 정보를 공유해야 융합적인 안보 위협에 더 잘 대응할 수 있다. 지금은 코로나처럼 재난 이슈도 안보 문제가 되는 시대다. CIA가 코로나 동향을 수집하고 모사드가 진단키트를 들여오지 않았나. 코로나 이슈를 동향보고한다면 초안은 질병관리청이 잡고, 국내 정보는 행안부가, 해외 정보는 국정원이 수집해 공유하고 의견을 붙이는 식이다. 불확실성도 높고 다양한 위험들을 하나의 정보기관이 다 다룰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