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1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내 부둣가 끝에 위치한 2야드 판넬2공장에서 8개월 전 하청업체 노동자가 사망한 폭발 사고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고 당시 공장 내부에 둘러쳐진 접근 금지 테이프도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았고, 언제든지 작업해도 될 정도로 말끔히 정돈돼 있었다.
다만 부자연스러운 게 하나 있었다. 각종 공사 도구를 모아두는 철제 캐비닛 문짝들은 모두 떼어져 있었다. 판넬2공장에서 일하던 한 직원은 "여기서 폭발이 일어났을 때 철제 문짝들이 튀어나오면서 사망한 노동자 근처에 있던 직원들 방향으로 날아갔다"며 "사고 탓인지 회사에서 다 떼내 버렸다. 문제는 그게 아닌데…"라고 고개를 갸웃했다.
현대중공업 직원들은 지난 4월 폭발 사고 원인을 '낡고 불량한 가스 호스'로 지목했다. 수동절단기 불똥이 호스에서 새고 있는 가스에 튀면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당시 절단기로 작업 중이던 노동자는 11m가량을 날아갈 정도로 큰 충격을 받고 숨졌다. 회사도 지난해부터 제품 결함을 알고 있었다는 게 직원들 주장이다.
"중대재해법이 시행되면 뭐해요. 법 취지가 좀 더 안전한 환경을 만들라는 거 아닌가요. 문짝 떼어내면 안전해질까요. 낡고 불량한 가스 호스를 모두 폐기하고 정상 제품으로 교체해야 안전해질 텐데요."
실제로 판넬2공장 내부엔 낡은 호스가 여전히 여럿 눈에 띄었다. 이음새 부분이 살짝 찢어진 호스도 있었고, 먼 곳에서 작업하려고 호스 2개를 위태롭게 이어 붙인 경우도 있었다. 폭발 사고 이후에도 특별히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이 사건은 부산고용노동청 울산지청에서 수사 중이다. 현대중공업은 "관계기관과 협조해 정확한 사고 내용과 원인을 밝히고 재발 방지책 마련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1년 가까이 지났지만, 현장에선 "뭐가 바뀐 건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사업주나 경영책임자가 안전보건관리체계를 확보하지 않았을 경우 처벌할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고 하지만, 작업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화가 없다는 것은 사망자 통계로도 확인된다. 올해 3분기까지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는 510명에 달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 사망자(502명)와 비교하면 8명이 늘어났다. 사망자는 중대재해법 적용 사업장에서 더 증가했다. 특히 중대재해법이 적용되는 상시 노동자 50인 이상(건설업은 공사금액 50억 원 이상) 사업장에서도 지난해보다 사망자가 24명이 더 늘었다.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중대재해법 취지가 곡해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20년간 조선소 하청업체에서 일한 이남중(53)씨는 "노동자들은 중대재해법으로 대표가 구속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며 "그런데도 회사에선 대표 구속이나 처벌 여부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고 지적했다. 안전한 작업 환경을 만드는 게 우선인데도, 대표에게 불똥이 튀지 않도록 방어에만 급급하단 얘기다.
대형건설사에 다니는 윤모(38)씨는 회사가 안전보건 담당 임원(CSO)을 '총알받이' 역할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윤씨는 "사고가 발생하면 사측에서도 'CSO가 구속되면 되겠네'라는 말부터 한다"며 "안전보건관리체계를 다시 점검하고 보강하는 계기로 삼기보다는 CSO 처벌을 통해 대표를 지킬 생각만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예방책 마련보다 처벌 피하기에 집중하다 보니, 중대재해법에서 요구하는 '원청이 책임지는 안전보건관리체계'는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일부 업체에선 안전관리 업무마저 하청을 주고 있다. 가스폭발 사고가 발생한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판넬2공장 사업장도 '신아'라는 하청업체가 도급을 받았고, 신아는 다시 '글로벌안전관리'라는 회사에 안전관리 업무를 맡겼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안전관리 규정은 하청업체를 포함해 전체 사업장에 동일하게 적용돼야 사고 예방에 효과가 있다"며 "하지만 하청업체가 재차 도급을 주면서 자체 규정을 만들다 보니 안전관리 업무에 빈틈이 생기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하청업체 사정은 더욱 열악하다. 대기업 노조처럼 집단적으로 의견 표출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내에서 '안전'이란 말조차 꺼내기 힘든 분위기다. 특히 원청업체에 일감을 따내야 하는 '을'의 입장에선, 원청을 상대로 안전보건관리체계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
선박해체전문 하청업체에서 안전관리 업무를 맡고 있는 권모(45)씨는 이렇게 하소연했다. "현장에 가보면 절차가 지켜지지 않고 마땅히 있어야 할 장치가 없는 경우도 허다해요. 문제가 있다는 걸 알지만, 하루하루 '운'에 맡기고 일하고 있습니다."
권씨가 제시한 해법은 간단했다. 안전한 작업장을 만들려면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안전하려면 돈을 써야 한다"며 "중대재해법에선 원청업체가 하청업체를 고를 때 안전관리에 얼마나 많은 예산을 배정하는지 평가하도록 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여태껏 안전 예산을 얼마나 책정했는지 물어보는 원청업체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