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인접국인 몰도바마저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러시아산 에너지 공급이 끊긴 데다 우크라이나로부터 전력을 들여오기도 어려워지면서 몰도바는 유럽 어느 나라보다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다.
에너지 가격 급등에서 비롯된 고물가로 민생은 이미 파탄지경이다. 이 기회를 노린 친러시아 정치인들이 정권 흔들기에 나서면서 몰도바에는 정치 불안까지 더해졌다.
12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과 미국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최근 몰도바는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다. 인플레이션율이 35%를 기록하며 서민 삶도 급격히 각박해졌다. 지난달 여론조사에선 응답자 42.5%가 기본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21.5%는 최소한의 필수품조차 부족하다고 답했다.
몰도바 수도 키시너우에 있는 한 식료품 가게 직원은 “노인들이 가게 창문 안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모습을 자주 본다”며 “그들에겐 우유 같은 기초 생필품조차 살 돈이 없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몰도바가 처한 에너지 위기는 심각하다.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즈프롬은 10월 이후 몰도바에 천연가스 공급량을 60% 줄였다. 그간 전력을 이웃나라 우크라이나에서 끌어다 썼으나, 이젠 그러기도 쉽지 않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화력·수력 발전소와 전력망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에너지 시설을 대대적으로 공격했을 당시엔 우크라이나와 전력망이 연결된 몰도바에서도 국토 절반 이상이 24시간 넘게 전기가 끊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루마니아에서 전기를 수입하고 있지만, 루마니아도 에너지 비축량이 충분하지 않다. 몰도바 정부는 러시아 에너지를 대체하는 비용으로 10억 유로 이상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경제 위기는 정치 혼란으로 이어졌다. 몰도바는 구소련 국가이지만, 마이아 산두 몰도바 대통령은 친서방 성향으로 그간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해 왔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단호히 반대하며 우크라이나 피란민을 포용했다. 그러나 친러시아 성향 야당 정치인들은 민생 위기를 파고들어 “러시아와 다시 친밀한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키시너우에선 9월부터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데, 야당이 뒷돈을 주고 시위 참석자들을 동원한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안드레이 스피누 몰도바 부총리 겸 인프라부 장관은 “러시아는 몰도바 정부를 교체하고, 유럽에 대한 지정학적 선택을 바꾸려 한다”고 규탄했다.
군사적 위협도 무시할 수 없는 불안 요인이다. 몰도바는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을 뿐 아니라, 친러시아 분리주의 지역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대치하고 있다. 러시아군 병력도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해 있어 안보 불안이 크다.
러시아가 몰도바로 미사일을 직접 쏘지는 않았지만, 무력 충돌 여파가 미치기도 했다. 10월 31일에는 우크라이나군 방공망에 격추된 러시아 미사일 잔해가 몰도바 국경 마을에 떨어졌다. 이달 5일에도 미사일 파편이 덮쳐 전력망에 장애가 발생했다. 산두 대통령은 미국 CNN방송 인터뷰에서 “우리는 군사적 수단과 비군사적 수단이 혼합된 ‘하이브리드 전쟁’에 직면해 있다”며 “러시아는 몰도바 상황을 불안정하게 만들려 한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