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정성화, 14년 동안 안중근으로 산 배우의 각오 [인터뷰]

입력
2022.12.18 10:17

차가운 눈밭을 걸어나가던 투사들은 자신의 손가락 하나씩을 자른다. 피가 설원을 물들이는데도 표정에는 망설임이 없다.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 '영웅' 속 인물들이다. 그 중심에 있는 안중근을 연기한 배우 정성화는 마음가짐부터 남달랐다. 그는 '목숨 걸고 제대로' 하겠다는 각오로 촬영에 임했다.

정성화는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영화 '영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영웅'은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준비하던 때부터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마지막 1년을 그린 작품이다. 정상화는 대한제국 독립군 대장 안중근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안중근 역할의 무게감

정성화는 2009년 뮤지컬 '영웅'의 초연부터 14년 동안 안중근을 연기해왔다. 그러나 영화 '영웅'에서도 자신이 안중근 역할을 맡으리란 생각은 못 했다고 밝혔다. 황정민 조승우 등 무대와 스크린을 오가고 있는 다른 훌륭한 배우들도 많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역할을 제안하시면 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감독님께서 '성화 너를 안중근으로 하기로 했다'고 말씀해 주셨다"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처음엔 캐스팅 소식을 듣고도 무덤덤했으나 점점 그 무게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단다. 뮤지컬 영화를 생소하게 느끼는 국내 관객들이 많은 만큼 '이 작품에 실망하시면 이런 영화를 다시 안 보실 텐데'라는 생각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안중근이 정성화의 롤모델이자 선생님이라는 점에서 '영웅'이 안기는 책임감은 더욱 컸다. "대부분 안중근 의사에 대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철학가적 모습, 사상가로서의 모습 등이 있다.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정성화의 설명이다. 큰 무게감을 떠안은 채 그는 다시 한번 안중근의 옷을 입었다. 정성화의 열정은 '영웅' 속 안중근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목숨 걸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독님께서 제게 살을 빼야 한다고 하셔서 86kg에서 72kg까지 감량했죠. 72kg에서 73kg을 왔다 갔다 하며 촬영했습니다."

영화와 뮤지컬의 차이점

영화 '영웅'은 뮤지컬 '영웅'과의 차이점을 여러 가지 확보하면서 신선한 재미까지 추구했다. 개봉을 앞둔 '영웅'의 윤제균 감독은 "원작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영화적 체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고 밝힌 바 있다. 정성화는 "뮤지컬에 없는 장면이 추가됐다. 뮤지컬에서 회령전투가 언급만 되는데 영화에선 디테일하게 표현된다"고 했다. 이 외에도 많은 요소들이 새로움을 더했다. 검사와 대화를 하는 장면도 추가됐고 중국인 링링은 한국인 마진주(박진주)로 바뀌었다. 정성화는 "이런 것들이 같은 작품이지만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라면서 만족감을 드러냈다.

배우들의 표현 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정성화는 "노래를 포기하고 감정을 내세워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공연에서는 많은 관객분들이 홀을 채웠을 때 그곳을 울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 A석 관객까지 연기가 닿아야 한다. 하지만 영화서는 그렇게 하면 어색하다. 작고 섬세한 연기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도 말했다. 안중근 캐릭터도 다르게 표현했단다. 정성화는 "공연은 캐릭터가 갖고 있는 에너지가 관객들에게 세게 다가가야 한다. 같은 걸 표현하더라도 크게 목소리를 내야 해서 관객분들이 안중근에 대한 이미지를 강하게 생각하셨을 거다. 그런데 영화로는 비범한 사람의 평범함을 그려내고 싶었다. 생활 연기가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덤덤하고 절제된 모습을 보여줬다"고 전했다.

질투 날 정도로 잘한 김고은

커다란 스케일로 펼쳐지는 액션 신들은 정성화에게 큰 즐거움을 안겼다. 그는 "너무 재밌고 욕심이 났다. 펑 하고 폭음이 들려오면 어떤 배우는 트라우마를 겪기도 한다는데 난 즐겼다. 뒤로 떨어지는 장면도 재밌었다. 그런 장면들이 있고 내가 그 화면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고 설명했다. 다른 배우들과 함께하는 장면들에서도 기쁨을 느꼈단다. 정성화는 "'그날을 기약하며'를 할 때 누군지 모르는 아낙네가, 그리고 나무꾼이 노래를 부르고 가는 모습이 편집으로 함께 나타나는 걸 보며 '뮤지컬과 다르구나' 싶었다. 안중근 의사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듯 느껴졌다. '무대에서 보여줄 수 없는 게 뮤지컬 영화에서 가능하구나' 싶었다"고 밝혔다.

'영웅'을 함께 이끈 김고은은 믿음직한 배우였다. 김고은이 연기한 역할은 독립군 정보원 설희다. 과거 정성화는 김고은이 설희 역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진짜요? 너무 감사합니다, 감독님"이라고 말했다. 그는 김고은에 대해 "화면에서 봤을 때 엄청났다.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다는데 질투가 날 정도로 대단했다. 뮤지컬 영화가 활성화되는 상황이 생긴다면 좋은 역할을 하실 듯하다"고 이야기했다. 정성화의 말에서는 김고은을 향한 깊은 신뢰가 묻어났다.

정성화가 배운 것

정성화는 '영웅'을 통해 대한민국의 뮤지컬 영화 시장이 활짝 열리길 바란다. 오랜 시간 무대에서 활약해온 그 다운 소원이다. 정성화는 "그동안 잘 된 뮤지컬 영화를 찾아보기 어려웠고 그만큼 투자도 활발하지 못했다. 뮤지컬 영화를 적극적으로 공부하신 감독님이나 음악 감독님도 안 계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내 영화계를 '뮤지컬 영화 불모지'라는 말로 표현했다. 새롭게 땅을 파 지은 좋은 건물 '영웅'이 뮤지컬 영화계를 사람들로 채워나가길 바란다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영웅'은, 그리고 안중근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정성화 그에게도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 중이다. 인터뷰 중 그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 '고막고어자시'를 언급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잘난체할수록 외로워진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작품에 임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그분의 가르침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안중근이 준 교훈은 이뿐만이 아니다. "안중근 의사는 한곳에 머물지 않았어요. 독립을 위해 상하이에, 그리고 대련에 갔죠. 스스로의 역할을 찾아다니신 거예요. 배우인 저도 절 써 주길 바라기보단 먼저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계속 도전하고 발전해 나가다 보면 안중근 의사 같은 삶을 살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정성화의 열정이 담긴 '영웅'은 오는 21일 개봉한다.

정한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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