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의 신화가 된 레슬러

입력
2022.12.1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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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5 역도산

1954년 2월, 일본 닛폰TV가 프로레슬링 경기를 방영했다. 스모 선수 출신 역도산(力道山, 리키도잔)과 유도 스타 출신 기무라 마사히코가 편을 이뤄 미국의 벤-마이크 사프 형제와 맞붙은 리턴 매치. 샤프 형제의 일방적인 우위 속에 기무라가 그로기 상태로 링에서 물러나온 직후 시작된 2라운드. 역도산은 거구의 샤프 형제를 잇달아 링에 메다꽂으며 ‘분노의 복수’를 감행했다. 경기 결과는 무승부였지만 MVP는 당연히 역도산이었다.

53년 8월 개국한 일본 최초 TV방송사의 야심 찬 기획이었다. TV수상기를 보유한 가정은 극소수였고, 월드컵 경기 때마다 대형 전광판 앞에 모여 함께 응원하는 요즘처럼, 당시 시민들은 TV 매장 앞에 모여 그 경기를 지켜봤다. 2차대전 패전국이 된 지 9년, 국권을 회복(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한 지 겨우 2년째 되던 해였다. 역도산의 활약은 일본인들의 미국에 대한 열등감과 패배의식을 씻어준 ‘역사적’ 쾌거였고, 그는 단숨에 영웅으로 급부상했다.



반면 체면을 구긴 기무라는 그날 경기가 ‘각본에 의한 쇼’였다며, 누가 더 강한지 겨루자며 역도산에게 도전했다. 그해 12월 도쿄 스모대회장에서 열린 둘의 ‘리얼 매치’에는 2만 명이 넘는 관객이 몰렸고, TV로도 중계됐다. 기무라에게 급소를 걷어 차인 역도산은 길거리 싸움판을 방불케 하는 투지로 기무라를 무너뜨렸다. 역도산의 불패 신화는 그렇게, 1963년 12월 15일 야쿠자의 칼에 숨을 거두기 전까지 이어졌다.

함경남도 홍원군(현 신포시)에서 태어나 씨름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한 일본인의 눈에 들어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모를 시작했고, 2위 등급인 세키와케까지 진출한 뒤 49년 은퇴해 레슬러로 전향했다.
공적으로는 철두철미한 일본인이었지만, 그의 삶은 해방 후 재일 조선인의 차별에 대한 민족주의적 의기의 좋은 소재로 선택적으로 소비되곤 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기량과 흥행사로서의 감각으로 일본을 쥐고 흔든 프로레슬러였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