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임윤찬(18)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기념 리사이틀은 최연소 우승자다운 면모는 물론 "음악만을 위해 살고 싶다"던 우승 직후의 다짐을 입증해 보인 무대였다. 부드러운 음색으로 낯선 영국 작곡가 올랜드 기번스의 음악 세계로 청중을 안내했고, 프란츠 리스트를 연주하는 거침없는 타건에선 헌신적 노력이 읽혔다. 관객은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며 기립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콩쿠르 스타'의 실연에 대한 맹목적 지지가 아닌 새로운 음악에 눈뜨게 해 준 한 예술가에 대한 헌사의 표현이었다.
임윤찬은 지난 6월 제16회 미국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이후 여러 무대에서 국내 음악팬과 만났지만 자신만의 음악 세계와 색채를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독주회는 처음이었다. 티켓 예매 첫날 2,400여 좌석을 매진시킨 관객의 열렬한 환영 속에 짧아진 헤어스타일과 연미복 차림으로 성큼성큼 등장한 임윤찬은 박수 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연주를 시작했다.
1부 연주 곡목에는 전설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대한 존경심이 듬뿍 담겼다. 굴드를 통해 재조명된 기번스의 '솔즈베리 경의 파반느와 갈리아드'와 바흐의 '인벤션과 신포니아' 중 '15개의 3성 신포니아'를 연주했다. 굴드가 독창적 연주로 명성을 얻었듯 임윤찬의 연주는 뻔하지 않았다. 기번스는 17세기 초 작곡가이자 발현 건반악기 '버지널(소형 하프시코드)' 연주자였다. 임윤찬은 자칫 밋밋하게 들릴 수 있는 르네상스 음악에 절제된 터치로 부드럽고 따뜻한 음색을 입혔다.
신포니아 15곡은 1번부터 15번까지 차례로 연주하지 않고 굴드가 잘츠부르크 축제에서 선보인 연주 순서를 따랐다. 피아노 학습자가 교과서처럼 활용하는 곡이어서 음악회 청중에게는 지루하게 들리기 쉬운 이 곡에도 임윤찬은 자신만의 색깔을 담았다. 장조곡에서 흥겹게 리듬을 타다가도 단조곡으로 넘어갈 때면 곡과 곡 사이의 휴지부를 조금 길게 가져가며 호흡을 고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압권은 리스트의 '두 개의 전설'과 '순례의 해' 중 이탈리아 제7곡 소나타풍 환상곡인 '단테를 읽고'(단테 소나타)를 들려준 2부였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준결선에서 연주해 최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의 '올해의 10대 공연' 목록에서도 언급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으로 임윤찬에게 '입덕(덕후 입문)'한 음악팬의 기대감을 충분히 만족시켜 준 무대였다. 초절의 기교와 서정적 감성이 동시에 묻어났다. 트레몰로는 섬세했고, 정확하면서도 빠른 속도의 담대한 타건은 "쓰러질 때까지 연습한다"는 10대 피아니스트의 힘겨웠을 연습 과정을 짐작케 했다. 그는 최근 발매한 앨범에 실린 인터뷰에서 "아홉 살 때부터 10년 동안 거의 단 하루도 연습을 거르지 않았다"며 "콩쿠르 이후에 조금 연습을 덜하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할 게 더 많이 생겼다"고 밝혔다.
아이돌 스타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함성 속에 임윤찬은 무려 12번의 커튼콜에 응하며 바흐의 ‘시칠리아노’와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 두 곡을 앙코르로 들려줬다.
공연은 커튼콜 횟수뿐 아니라 여러모로 진풍경을 연출했다. 공연장 로비에서 판매된 임윤찬 연주 앨범 1,000장과 객석 규모에 맞춰 2,000부 준비한 프로그램북을 사려는 인파가 공연 3시간여 전부터 몰렸고, 공연 시작 전에 동났다. 티켓을 구하지 못한 일부 관객은 로비 모니터로 공연 실황을 지켜보기도 했다.
임윤찬의 이날 연주는 예술의전당 영상화 사업인 '삭 온 스크린(SAC on Screen)'의 일환으로 영상으로 촬영됐다. 이 공연을 끝으로 일본 도쿄에서 시작해 경남 통영, 대전을 거쳐 서울까지 이어진 임윤찬의 이번 리사이틀 일정이 마무리됐다. 임윤찬은 내년 1월 영국 런던 위그모어홀 데뷔 무대를 갖는 등 본격적인 해외 활동에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