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 죄송 금지

입력
2022.12.07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일본 원정을 앞두고 한국 대표팀은 “일본에 패할 경우 모두 현해탄에 빠지겠다”고 각오했다. 전설 같은 이 이야기는 2019년 선수 전원이 서명한 각서가 공개되며 가볍지 않게 환기됐다. 광복된 지 얼마 안 된 터라 국민감정이 날카로웠고,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일본에 질까 봐 월드컵 출전을 반대했었다. 1승1무로 끝난 한일전은 ‘1954년 도쿄대첩’으로 불리게 됐는데, 선수들은 실제 전쟁에 나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선수 상당수가 군인이기도 했다.

□ 군사독재 정부에서도 스포츠는 국가의 명예이자 정신이었다. 국가대항전에 나가는 선수들을 정부가 지원하고 상벌을 줬다. 이기면 “대통령 각하께 감사”와 “조국에 영광”을 외치던 시절이었다. 이 엄숙한 집단주의에 균열을 낸 이는 권투선수 홍수환이었다. 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세계복싱협회(WBA)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그는 생중계 라디오에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소감으로 ‘스포츠 개인주의’를 선언했다.

□ 승부의 비정함마저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소감은 ‘피겨 퀸’ 김연아 선수가 보여주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그는 판정 논란 끝에 은메달을 걸었다. 온 국민이 러시아와 심판진에 비난과 분노를 쏟아낼 참에 김연아는 “결과가 어찌 됐든 경기가 잘 끝났다는 것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경기 직후 터져나온 눈물에 “억울함이나 속상함은 없다”고 했다. 성숙한 선수 반응이 국민을 다독였고 팬들은 ‘영원한 여왕’에게 박수를 보냈다.

□ 7일 귀국한 2022 카타르 월드컵 한국 대표팀에 팬들은 ‘죄송 금지’ ‘미안 압수’라 말하고 있다. 최선을 다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주장 손흥민 선수는 이미 “감독님의 마지막 경기를 벤치에서 같이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흐뭇한 소감을 포르투갈전 승리 후 남겼다. 휘슬을 불면 다시 태극기는 휘날리겠지만, 이기지 못하면 고개 숙이는 시대는 저물고 있다.

김희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