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기 회사채가 있다. 원금보장은 물론이고 매년 2~5% 이자를 보장해준다. 여기에 보너스까지. 발행 1년 후부터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전환권)까지 부여한다. 채권 매입 당시 약속한 주식 전환가격보다 시세가 떨어지면 전환가격까지 낮춰준다. 주가가 오르면 주식으로 전환하고, 차익이 크지 않으면 원금과 이자를 받으면 된다. 전환사채(CB)의 매력이다.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과 배상윤 KH그룹 회장은 ‘CB 공장장’으로 불렸다. 두 그룹은 CB를 이용해 회사를 키웠고, CB 발행을 통해 투자받은 돈으로 다른 회사를 인수했다. 계열사 간 서로의 CB를 사고팔아 차익 실현도 했다. 주식 전환이 가능할 때 맞춰 호재가 터진 덕이다. 발행된 CB는 여러 매각 과정을 거쳐 조합원을 알 수 없는 투자조합으로 넘어갔다. 이후에는 자금을 추적하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 피해가 발생했다면 이 알고리즘에서 배제된 투자자 몫이었다. 통상 CB 발행은 기존 투자자에게는 악재다. 주식 수가 증가하면 주가는 하락할 수밖에 없는 데다, 호재 타이밍은 개미투자자들이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일보는 쌍방울과 KH그룹 계열사 중 상장 회사 13곳 중 전환사채를 발행한 12곳의 CB발행 내역과 전환가액(전환 시 주식가격) 등을 분석해 CB 공장의 이면을 들여다봤다. 취재 과정에선 금융투자 소송 경험이 풍부한 김광중 변호사(법무법인 한결)와 경제민주주의21 공동대표 김경율 회계사의 도움을 받았다. 김성태 전 회장과 배상윤 회장이 전환사채를 활용해 자금을 충당한 뒤 ‘무자본 M&A’를 일삼는 동안 자본시장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쌍방울과 KH그룹이 기업을 인수한 뒤 매년 흑자를 기록하던 기업들은 적자로 전환됐고, 개미투자자를 비롯한 주주들이 대부분의 손실을 떠안았다. 승자와 패자가 정해져 있는 ‘머니게임’이나 다름없었다.
25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쌍방울그룹은 김성태 전 회장이 2010년 인수한 뒤 △쌍방울 4회 750억 원 △광림 8회 1,002억 원 △인피니티엔티(현 디모아) 3회 208억 원 △비비안 3회 250억 원 △미래산업 3회 211억 원 △아이오케이 5회 235억 원 △나노스(현 SBW 생명과학) 4회 800억 원 등 상장사 7곳에서 총 27회에 걸쳐 3,456억 원의 전환사채를 발행했다. 이들 회사의 시가총액(23일 종가 기준) 5,427억 원의 64%가 CB인 셈이다.
주식으로 전환된 CB는 상당한 시세차익을 봤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전환권 행사(CB를 주식으로 전환하는 것) 뒤 곧바로 주식을 매도했다면, CB 투자자들은 △나노스 2,169억 원 △광림 411억 원 △아이오케이 214억 원 △쌍방울 63억 원 △미래산업 35억 원 △비비안 13억 원의 차익이 예상된다. 이는 CB를 주식으로 전환할 때 약속한 주식 가격(전환가액)과 그날 실제 주가의 차액을 비교해 계산한 결과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2020년 1월 28일 코스닥에 상장된 나노스의 3회차 CB 전환가액은 456원이었다. 한국거래소 공시에 따르면, 이날 3회차 CB 가운데 절반 정도가 3,289만 주로 전환됐다. 150억 원 정도에 나노스 주식 3,289만 주를 매수한 것이다. 그러나 이날 나노스의 종가는 전환가액보다 9배 정도 높은 4,115원이었다. 만약 3,289만 주를 모두 팔았다면 1,354억 원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다. 시세차익만 따져도 1,204억 원에 달한다. 나머지 절반의 주식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처분했다면, 총 2,169억 원의 차익이 생겼을 수 있다.
나노스 주가가 급등한 이유는 '대북 사업’ 호재 덕이다. 나노스는 2016년 4월 회생절차를 신청할 정도로 회사 사정이 어려웠다. 쌍방울·광림 컨소시엄은 이후 나노스 인수를 마무리하고 2017년 2월 15일 채무 변제를 모두 완료하면서 회생절차도 종결됐다. 그리고 2주 뒤 3회차 CB 300억 원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다. 최대주주인 쌍방울과 광림이 CB를 모두 사들였다. CB 발행가액은 1주당 500원이었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나노스가 ‘남북경협테마주’로 분류돼 2018년 남북정상회담 직전부터 주가가 급등했다.
검찰도 이 부분을 주시하고 있다. CB를 사들인 곳은 쌍방울과 광림이었지만, CB는 한 달 뒤 ‘제우스1호투자조합’으로 넘어갔다. 제우스1호투자조합의 조합장은 따로 있지만, 실소유주는 김 전 회장으로 알려졌다. 조합원에는 대북송금 혐의로 구속된 이화영 전 국회의원 보좌진 출신 A씨도 포함돼 있다. KH건설도 2019년 6월 제우스1호투자조합 지분을 취득했다. 배상윤 회장과의 연결고리도 드러난 셈이다. 나노스 주가가 오를수록 제우스1호투자조합과 실소유주인 김 전 회장, 그리고 조합원 이익도 늘어나는 구조가 완성됐다.
나노스에는 이 전 의원이 2017년 3월 사외이사로, 2019년 1월엔 안부수 아태평화교류협회 회장이 사내이사로 선임되며 각종 대북 관련 협약(MOU)을 체결했다. 이화영 전 의원은 이후 경기도 평화부지사 시절 대북 교류사업을 적극 추진했고, 쌍방울은 이 시기에 나노스의 CB 전환권을 행사했다.
기업 인수전(M&A)도 주가 상승을 견인했다. 쌍방울은 회사 실적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스타항공과 쌍용차 등 기업 인수전에 적극 뛰어들었고 주가는 한때 상한가를 찍었다. 쌍방울은 2020년 4월 2일 주식회사 미래아이앤지에 ‘상품 매입대금 등 결제’를 목적으로 발행한 9회차 CB 45억 원을 발행해 11개월 만에 조기 상환했다. 당시 종가는 628원으로 전환가액(620원)과 큰 차이가 없었다.
상환 후 소각됐어야 할 CB는 3개월 뒤 개인 투자자 5명에게 재매각됐다. 5명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들은 이스타항공 인수전 시기 주가가 2배 이상 치솟은 시기(6월)에 매도하며 엄청난 차익을 남겼다. 이 시기 쌍방울 주가는 장중 1,445원까지 올라갔다. 현재 주식은 300원대에서 거래되고 있다.
KH그룹은 기업을 사들인 뒤 쌍방울보다 더 적극적으로 CB를 발행했다. 배상윤 회장은 △KH필룩스 23회 2,605억 원 △IHQ 11회 1,555억 원 △KH건설 11회 1,300억 원 △KH전자 10회 1,271억 원 △장원테크 10회 1,080억 원 등 총 7,811억 원의 CB를 발행했다. 이는 5개 기업의 시가총액(23일 종가 기준 3,517억 원)의 222% 수준이다. 배 회장은 CB 발행으로 확보한 자본으로 남산 그랜드하얏트 서울 호텔과 강원도 알펜시아리조트를 인수하는 등 '남의 돈'으로 회사 몸집 부풀리기에 나섰다.
KH그룹이 발행한 CB를 사들인 투자자들이 전환권을 행사한 이후 곧바로 주식을 매도했다면, CB 투자자들은 △KH필룩스 1,528억 원 △KH전자 63억 원 △장원테크 208억 원 △KH건설 321억 원의 차익이 예상된다. 단 IHQ는 3억 원 손실이다.
KH그룹도 'CB 발행 → 신사업 투자 → 주가 급등' 공식을 충실히 따랐다. 필룩스가 대표적이다. 필룩스가 2018년 4월 신약개발 업체인 리미나투스 파마를 인수하자 필룩스 주가는 최대 2만8,000원대까지 급등했다. 인수 당시 4,000~5,000원대였던 필룩스 주가가 5~6배 상승한 것이다. 이후 KH필룩스는 지난해 6,000여억 원에 하얏트 호텔을 인수했고, 올 초에는 7,000여억 원을 들여 알펜시아까지 사들였다. 쌍용차 인수에 나서자 KH필룩스 주가는 또다시 요동쳤다. KH필룩스 주식이 23일 기준 746원으로 떨어진 사이 CB는 23번이나 발행됐다.
KH필룩스는 배 회장에게 인수된 뒤 2년이 지나자 적자를 기록했다. CB는 전환되기 전에는 부채로, 전환 후에는 자본으로 재무제표에 기록된다. 때문에 CB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할수록 부채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전환 후에도 평가손실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 재무 구조가 개선되기 어렵다.
현재 KH그룹 내 대다수 회사의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주식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 주가가 하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IT부품회사인 장원테크의 경우 인수 당시 주가는 3만1,550원이었는데 23일 종가는 997원이었다. 3년여 만에 주가가 약 97% 폭락한 것이다. KH건설(23일 종가 516원), KH전자(23일 종가 261원) 등도 인수 시점에 비하면 주가가 각각 89%, 97% 떨어졌다.
쌍방울그룹과 KH그룹, 이른바 ‘CB 공장’에는 공통점이 있다. CB 발행 대상, 즉 CB를 사들이는 곳에 조합원이 공개되지 않는 사모투자조합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CB가 주식으로 전환된 뒤 주가가 올라도 누가 돈을 벌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구조다. 게다가 순환 출자로 묶여 있는 계열사로 CB가 발행되는 경우도 많다. 주가 부양이 곧 계열사 전체의 이익과 직결되는 것이다. 김경율 경제민주주의21 대표는 “CB는 유상증자와 달리 사주겠다는 사람만 있으면 발행하기 쉽다”며 “CB를 발행한 뒤 호재를 터뜨리면 손쉽게 ‘합법’의 외관을 쓴 채 수익을 챙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CB 거래도 어렵지 않다. 페이퍼컴퍼니가 CB를 인수한 뒤 재판매하면 표면상 인수자와 실제 인수자가 다를 수 있다. CB로 누가 얼마나 수익을 봤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김광중 법무법인 한결 변호사는 “지분공시 대상이 되기 전까지는 CB가 주식으로 전환돼 상장될 때 해당 주식을 누가 소유하고 있는지 공개되지 않는다”며 “차명으로도 거래할 수 있고, 실제 거래내역을 보지 않는 이상 누가 얼마의 이익을 얻었는지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전환사채 관련 공시는 불성실한데다가, 주식으로 전환된 뒤부터는 추적이 쉽지 않아 사실상 ‘감시 사각지대’나 다름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는 지난 2월 쌍방울로부터 CB를 인수한 이들이 이스타항공 인수로 주가가 급등한 시기에 주식을 매도한 정황을 포착하고, 시세 조종이 있었는지 조사하고 있다. 전환권을 행사한 5명이 차명으로 거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매각 자금이 흘러간 곳을 살펴보고 있다.
이처럼 CB를 이용해 번 돈은 손쉽게 세탁될 수 있고 추적도 어렵기 때문에, 정치권 유입 의혹까지 제기되기도 한다. 쌍방울은 2018년 11월 김성태 전 회장의 투자조합인 착한이인베스트를 대상으로 CB 100억 원을 발행했다. 검찰은 이 CB가 전환되며 생긴 차액과 주식 등 20억 원가량이 이재명 경기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변호했던 이태형 변호사 등에게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수사 중이다.
◆수상한 왕국: 쌍방울·KH그룹의 비밀
<1> 유별난 검찰·정치인 사랑
<2> 기이한 덩치 키우기
<3> 대장동과 그들의 관계는
<4> 전환사채와 주가조작
▶‘수상한 왕국:쌍방울·KH그룹의 비밀’ 몰아보기(☞링크가 열리지 않으면, 주소창에 URL을 넣으시면 됩니다.) https://www.hankookilbo.com/Collect/8086
<1> 유별난 검찰·정치인 사랑
①[단독] 쌍방울·KH, 윤석열 대통령 친정을 방패 삼았다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0421180003514
②빚 내 기업 산 뒤 전환사채 찍어 또…'무자본 M&A'로 덩치 키워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1116380003475
③자신 구속한 검사 사외이사로… 대형 로펌 통해 로비 시도 정황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0520480003947
<2> 기이한 덩치 키우기
①[단독]"배상윤 회장 돈 세탁기였나" CB폭탄 돌리기 피해자의 절규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1604510002993
②바지사장 앉혀 조종 ‘판박이’…추적 힘든 현금으로 기업 인수도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0421370003492
<3> 대장동과 그들의 관계는
①[단독] 곽상도·대양금속·하얏트 주차장… 대장동과 쌍방울·KH의 연결고리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1615290005871
②도박장→대부업→주가조작… 기록으로 본 회장님 흑역사 들여다보니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0710530001829
<4> 전환사채와 주가조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