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강보험료(건보료)가 미납돼서 대출이 어렵겠는데요. 회사에 한번 문의해 보시겠어요?”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모(31)씨는 최근 은행 창구에서 황당한 소식을 들었다. 회사에서 1년째 건보료를 내지 않아 전세자금대출 심사에 차질이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알아보니 회사에서 매달 건보료 명목으로 돈을 떼 간 뒤 제대로 납부하지 않고 다른 용도로 쓰고 있었다. 김씨는 “대표는 ‘기다려 달라’는 답만 반복하고 있다”며 “신혼집 잔금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계약금을 날릴까 봐 초조하다”고 말했다.
#2. 스타트업 4년 차 직장인 이모(33)씨와 동료들은 국민연금관리공단으로부터 국민연금 체납 통지서를 받았다. 회사가 매달 월급에서 연금 보험료를 공제해 놓고 납부하지 않고 있어서다. 국민연금 역시 건보료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와 사업주가 반반씩 부담해 사업주가 일괄 납입한다. 상황을 인지한 회사의 답변은 “연말에 한꺼번에 내려고 모아둔 것이니 무시하라”는 것. 이씨는 “결국 손해를 보게 되는 건 회사가 아닌 직원”이라며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보험료를 제대로 납부하지 않는 사업주 탓에 월 급여에서 꼬박꼬박 노동자 부담분을 떼어 준 직원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을 위기다. “사정이 어려우니 기다려 달라” “조금 있으면 투자금이 들어온다” 등 사측의 갖가지 읍소에 직원들은 당장이라도 사직서를 던지고픈 마음을 꾹 누르며 속앓이만 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1개월 이상 건보료를 내지 않은 사업장은 누적 39만6,000곳, 체납액은 1조8,837억 원에 달했다. 전체적으로 건보료 누적 체납 건수와 액수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사업주가 직원들의 4대 보험료조차 내지 않고(또는 못하고) 있는 셈이다. 권남표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4대 보험 의무를 회피하려는 목적으로 정상적으로 근무하는 직원에게 프리랜서 계약을 강요하는 사례도 많다”고 귀띔했다.
직장가입자라면 건보료가 체납되더라도 병원 진료 시 불이익을 받지는 않는다. 납부 의무가 노동자가 아닌 사용자에게 있기 때문에 공단에선 ‘사용자가 체납했다’고 본다. 보험 적용에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 체납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는 직원도 많다. 문제는 대출 등 다른 부분에서 예기치 않게 터져 나온다. 김씨처럼 결혼이나 이사를 앞두고 대출을 위해 시중은행을 찾았다가 뒤늦게 체납 사실을 알게 돼 재산상 손해를 보는 불상사가 적지 않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최연숙 국민의힘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민연금 체납 통지를 받은 노동자는 80만6,135명, 올해 6월까지 35만6,312명이었다. 국민연금 연체의 경우 당장 와닿는 피해는 없지만, 향후 연금 수령에 부정적 영향을 주게 된다. 수령액 산출의 변수가 되는 가입 기간과 적립액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연금은 건보료와 다르게 노동자에게도 ‘사업주가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지 않고 있다’는 취지의 독촉장을 보낸다.
피해를 당한 직원은 회사 사장을 형사 고소할 수 있다. 앞선 판례에서 대법원은 노동자 임금에서 떼어 간 기여금을 임의로 사용한 사용자에게 ‘업무상 횡령죄’ 책임을 물었다. 애초에 직원들 급여에서 원천 공제하지 않고 납부도 하지 않았다면 ‘단순 미납’에 불과하지만, 꼬박꼬박 공제해 보관하다가 이를 회사 운영자금 등으로 끌어다 썼다면 업무상 횡령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형사 고소는 집단행동보다 강력하고 효과적 방법이지만, 직장 생활은 사실상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어 퇴사를 불사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체납 기간 국민연금 가입 공백이 우려된다면 ‘기여금 개별 납부제’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원래는 노동자 부담의 기여금(전체의 50%)을 공단에 직접 내면 개별 납부한 기간의 절반만큼 국민연금 가입 기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국민연금법이 개정되면서 원래 회사가 내야 할 부담금도 노동자가 전부 낼 수 있게 됐다. 공단 관계자는 “전액 납부하면 가입 기간도 100% 인정받을 수 있고, 이후 회사에서 밀린 보험료를 납부했을 때 이자를 붙여 환급한다”고 안내했다.
보험료뿐 아니라 연말정산에 따른 세금 환급금까지 늦게 주거나, 미지급하는 회사도 있다. 직장인 사이에서 ‘13월의 보너스’로 불리는 연말정산 환급금은 통상 2, 3월 중 급여와 지급된다. 하지만 A스타트업에 다니는 박모(29)씨는 지난해 연말정산으로 발생한 환급금을 해가 바뀌고, 다시 연말이 된 지금까지 받지 못했다. 박씨는 “50만 원 없는 셈 치고 지내자니 억울하고, 돈 없다는 대표와 얼굴 붉히며 싸우기도 부담스럽다”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역시 엄연한 ‘임금 체불’에 해당한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권 노무사는 “과거와 달리 지금은 국세청 ‘홈택스’ 사이트에 접속하면 환급금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며 “임금 체불로 고용노동부 지청에 신고하면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입사 당시 약속한 장기근속자 보너스와 특별 휴가를 회사가 임의로 없애거나 중단하는 것도 문제 삼을 수 있다. 최근 입사 5주년을 맞은 직장인 정모(33)씨는 회사 대표에게 장기근속 휴가와 보너스 300만 원을 요구했다가 “회사 경영 상황이 어려워 곤란하다”고 퇴짜를 맞았다. 그는 “한 달짜리 휴가와 보너스만 바라보며 힘든 회사생활을 버텨 왔는데 막상 누릴 때가 되니 대표는 직원이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닌 회사의 배려라며 가스라이팅 아닌 가스라이팅을 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이 같은 회사의 갑질은 근로기준법상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해당하기 때문에 무효다. 여수진 노무사는 “직원에게 불이익을 주는 취업규칙의 변경은 소속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만 유효하다”며 “이미 회사 내에서 장기근속 보너스나 특별 휴가를 당연한 관행과 약속으로 여기고 있다면 대표가 일방적으로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