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가 형법을 이슬람 보수주의에 가까운 방향으로 대대적으로 개정했다. 새 형법이 시행되면 혼전 동거와 혼인 외 성관계, 대통령 모욕 등이 전면 금지된다. 시민들은 개정안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들고 일어났다. 외국인에게도 법이 적용될 예정이라 관광 산업을 방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6일(현지시간) 안타라통신은 인도네시아 의회가 혼외 성관계와 혼전 동거, 임신중지(낙태), 대통령과 국가기관 모욕 시 처벌하는 내용을 담은 형법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고 보도했다. 사전 허가 없이 시위를 벌이거나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행위, 국가 이념에 반하는 의견을 표현하는 경우도 처벌한다.
인도네시아는 전체 인구의 약 87%가 무슬림으로, 세계에서 무슬림이 가장 많다. 그동안 인도네시아 이슬람은 세속적인 면이 강했지만 최근 종교적 보수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시민단체와 언론은 "새 형법은 자유를 침해한다"며 일제히 반대했다. 우스만 하미드 국제엠네스티 인도네시아 집행 이사는 "20년 넘게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덕분에 인도네시아가 발전했지만, (새 형법으로) 크게 후퇴하게 됐다"며 "애초에 개정안이 통과돼선 안 됐다"고 말했다. 일간지 '자카르타 포스트'는 "보수로의 전환"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개정된 형법이 우리 사회의 문화적, 이념적 다양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국제사회 주요 구성원이 되려는 (정부의) 노력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비판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앞서 2019년에도 비슷한 내용의 형법 개정을 준비했지만, 대규모 반대 시위에 막혀 개정 작업을 중단했다. 대신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겠다며 공청회를 진행했다. 하지만 동성애 처벌 조항을 삭제하고, 혼외 성관계 처벌법을 친고죄 형태로 바꾼 것 외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새 형법은 구체적인 규정 마련이 필요해 실제 적용까지 길게는 3년이 걸릴 예정이다.
인도네시아 전국 대학생 단체는 대규모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대통령과 부통령, 국가기관을 모욕할 경우 처벌하는 조항에 대해 '비판'과 '모욕'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없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바유 사트리아 우토모 전국 대학생 집행기구 사무총장은 "우리는 대규모 시위를 통해 법안에 반대한다는 것을 보여줄 계획"이라며 "우선 지역 단체의 의견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계는 새 형법이 팬데믹 이후 회복 중인 관광업에 '악재'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 법이 외국인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2019년 관광업은 인도네시아 국내총생산(GDP)의 5.7%를 차지하는 주요 산업이었지만, 팬데믹으로 위축됐다가 최근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관광산업위원회의 마우라나 유스란 부국장은 "외국인 커플에게 결혼을 했냐고 일일이 물어보라는 거냐"고 반발했다. 호주 언론은 인도네시아의 형법 개정안에 '발리 성관계 금지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발리는 2019년까지 연간 백만 명 넘는 호주인이 찾는 인기 관광지였다.
인도네시아 사법부는 "혼인 외 성관계 처벌 조항은 당사자의 배우자나 부모 등 가족이 고발해야만 수사할 수 있는 친고죄"라며 관광객들은 처벌받을 가능성이 적다고 해명했다. 이에 안드레아스 하르소노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선임 연구원은 호주 ABC방송에 출연해 "관광객이 현지인 애인을 사귀고, 현지인의 가족이 신고하면 문제 아니냐"며 "선택적 수사가 가능하다는 점도 위험하다"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