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투 감독이 옳았다

입력
2022.12.06 04:30
26면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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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월드컵에서 ‘빌드업’을 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지난 4월 카타르 월드컵 조 추첨 후 파울루 벤투 축구대표팀 감독의 ‘빌드업’ 축구에 대해 K리그의 한 감독은 이렇게 평가했다. 포르투갈, 우루과이, 가나와 같은 강팀과 빌드업 축구를 앞세워 ‘강대강’으로 맞붙는 것에 대한 우려였다. 대부분의 축구 전문가들 역시 그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축구 담당 기자들도 하나같이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무리한 빌드업 축구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합리적 이유도 있었다. 역대 기록을 보더라도 각 대륙의 강호들이 모인 월드컵 본선무대에서 한국이 경기를 이끌어간 적은 거의 없다. 안방에서 열린 2002 한·일 월드컵은 특수한 상황이었다. 나머지 대회에서는 늘 힘든 환경, 어려운 조 편성과 맞닥뜨렸다. 객관적 전력에서 한국보다 우위에 있는 팀을 만나야 했기에 상대에 맞춰 경기를 준비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다 보니 한국 축구는 월드컵에서는 능동적이지 못했다. 수비에 집중하다 역습을 노리는 익숙한 패턴이 반복됐다. ‘우리 축구’는 없었고 끌려다닐 때가 많았다.

2018년 8월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벤투 감독의 취임 일성은 “한국 축구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겠다”였다. 후방 빌드업과 전방위 압박, 빠른 공수 전개 등 점유율 축구를 하겠다는 선언이다. 4년 동안 숱한 문제점이 드러났다. 빌드업 도중 볼을 빼앗겨 결정적 실점 위기를 맞았고, 서로 호흡이 맞지 않아 실수를 연발했다. 위험 지역에서 압박이 풀리는 장면도 자주 나왔다. 그래서 월드컵에서는 점유율 축구가 아니라 강팀들에 맞춘 패턴 플레이와 포메이션 관련 선수들의 움직임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지난 6월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 곳곳에 구멍 난 ‘오답 노트’를 받은 이후 이 같은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한국은 상대의 압박에 후방에서 공격을 전개하기도 전에 공을 뺏겨 실점했다. 벤투 감독은 “그래도 지금의 스타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막상 월드컵 뚜껑이 열리자 우려와는 달랐다. 한국은 조별리그 3경기 모두 짧은 패스를 앞세운 ‘빌드업 축구’로 경기 흐름을 주도하면서 상대를 부담스럽게 했다. 선수들은 과거 월드컵처럼 마냥 웅크린 채 잠그면서 버티지 않았다. 돌파해야 할 때, 전개할 때, 주변과 볼을 돌리며 숨 고르기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타이밍을 지배한 대표팀은 경기를 원하는 대로 끌고 갈 수 있었다.

선전의 이유는 명확했다. 분명하고 뚜렷한 ‘우리 축구’를 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점유율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점유율을 높인 뒤 중원을 거쳐 중앙 침투나 측면으로 이어지는 벤투 감독의 구상과 전략대로 경기를 풀어갔다. 상대가 아주 강한 팀이고, 그 무대가 월드컵임에도 두려움이 없었다. 여기에 한국 특유의 왕성한 활동량과 투혼까지 더해지면서 경기를 지배했다. 좋은 경기력은 16강 진출이라는 합당한 보상으로 이어졌다.

2002년 4강 신화를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이 ‘오대영’으로 불리던 당시 했던 말이 있다. “평가전에서의 승리를 원하느냐, 아니면 월드컵에서 이기길 바라느냐.”

벤투 감독의 4년간 ‘빌드업 축구’ 고집은 월드컵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었다. 벤투 감독의 선택은 옳았다. 만약 우리가 16강에 오르지 못했더라도 그가 옳았다.

도하 = 김기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