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을 하며 더 많은 남성과 만나기 위한 방법으로 교육을 주된 활동으로 삼게 됐다. 아무래도 폭력 예방교육은 법정 의무교육이니까 더 많은 남성과 접점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것은 어느 정도 적중해서, 정말 다양한 연령·직종의 남성을 만나고 있다. 참 신기한 것은 같은 내용으로 강의를 해도, 어떤 이는 교육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다고 기뻐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영 무심한 태도로 자신의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이 통찰에서 비롯된 '안나 카레니나 법칙'도 있다. 이를 성평등 교육에 임하는 남성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듯하다. 교육에 관심 갖지 않는 남성들의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페미니즘에 관심 갖고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남성에게는 대개 확실한 무엇이 있다. 바로 동기부여다.
그러한 이유로 최근 성평등 교육을 하며 관심 두고 있는 집단이 있다. 바로 중년 남성, 아저씨들이다. 사실 이들은 오랫동안 강사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수년간 공부하고 쌓아 온 교육자의 전문성을 무시하고 권위적인 태도로 강사를 가르치려 들거나 한번 마이크를 쥐면 그 손을 놓지 못해 다른 참여자의 발언 기회를 빼앗아 여럿 난처하게 했다는 경험담이 흔하다. 나 역시도 아저씨들이 많은 집단을 만날 때면 더 긴장한다. 옷도 단정히, 말투도 더 자신 있게 하고 통계수치 같은 숫자도 정확히 해서 괜히 트집 잡히지 않게 조심한다. 그런데 최근 이들 사이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시작은 딸을 둔 아버지들부터다. 종종 교육에 참여한 중년 남성이 머쓱해하며 묻는다. "뭔 말만 하면 딸이 자꾸 화를 내는데, 어떻게 해야 싸우지 않고 대화할 수 있을까요?" 관심의 표현으로 건넨 안부인사가, 무심코 던진 말이 자꾸 화를 불러 답답해하다가 찾아온 경우다. 이런 경우는 확실한 동기부여가 있기에 교육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변화 가능성도 크다. 실제로 그렇게 페미니스트가 된 아빠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들은 딸의 삶을 경유해 페미니즘을 만났다. 내 자녀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자유롭게 꿈을 펼칠 수 있었으면 해서, 안전한 세상에 살았으면 해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한다고 한다.
통계자료에서도 변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작년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 "페미니즘·페미니스트에 거부감이 든다"는 의견에, 남성 중 가장 낮은 동의를 보인 세대가 바로 50, 60대 이상이었다. 20, 30대보다 거부감이 적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페미니즘을 몰라서 그런다고 폄하하거나, 기득권에서 보이는 온정적 성차별주의(불쌍하고 약한 여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럴지 모르지만, 한편으로 이 숫자에 담긴 사람들을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세상에 대한 반성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교육에서 고민을 토로하던 아저씨의 절박함은 진심이었고 그 절박함을 이끌어낸 건 수많은 페미니스트의 힘이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 않겠지만, 균열은 분명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동기마저 부족한 아저씨들은 어쩌면 좋을까. 애석하게도 세상에는 여전히 그런 아저씨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하지만 '아직'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아저씨들을 공략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아저씨의 외로움을 파고드는 것이다. 이상할 만큼 우리 사회는 혼자 사는 남성을 딱하게 여기며 다 큰 성인이 스스로 돌보지 못하는 것을 '홀아비 티' 낸다고 동정해 왔고 심지어 외로운 농촌 총각을 결혼시켜야 한다며 나라가 나서서 남성의 외로움을 걱정했다. 그런데 결혼한다고 해서 외로움이 가시냐 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각종 영화와 예능, 드라마 속 고독한 가장의 모습은 단골 소재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경제 위기는 늘 여성에게 더 치명적이었지만 세상에는 "아빠 힘내세요"라는 노래가 먼저 울려 퍼졌고 여성의 노동은 멈춘 적 없지만, 남성이 경제적으로 가족을 부양한다는 신화는 좀처럼 깨지지 않았다. 아저씨들의 해지고 낡은 작업복과 구두, 일과 후 지치고 고단한 모습을 숨기려 포장마차에서 쓴 술을 들이켜거나 식탁에 혼자 앉아 늘어난 러닝셔츠와 팬티 바람으로 늦은 식사를 하는 모습에 드리운 외로움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교육 때 자주 써먹는 아버지와의 일화가 있다. 가족사진을 찍으러 갔는데, 아버지가 유난히 자주 NG를 냈다. 지친 가족들이 아버지의 옆구리를 찌르며 구박하니, 촬영 기사님이 아버지를 위로하듯 이야기했다. "원래 중년 남성 사진 찍는 게 제일 어려워요." 이 말은 민망해하는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 중년 남성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보여 준다. 해맑게 웃거나 눈물 흘리며 능숙히 감정 표현하는 아저씨가 드물다. 그리 가부장적이거나 엄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은 나도 아버지가 울거나 웃는 등 감정 표현을 하는 모습이 생소하다. 이는 그 자체로 개인에게 큰 불행이지만 자신의 감정 표현이 어려운 만큼 다른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고 돌보기 어렵게 만드는 문제로도 이어진다.
나 역시 그랬다. 남성성을 좇고 따르던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슬픔을 마주할 줄 몰랐고 친밀한 관계에서도 상대가 눈물을 흘리거나 감정 표현을 하면 어쩔 줄 몰라 했다. 나 때문이 아니어도 당장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 같아 마음 졸이다 차라리 도망쳤다. 남성들에게는 저마다의 동굴이 필요하다는 동굴 타령은 그래서 슬프다. 동굴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만드는 남성다움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우리에게는 습하고 어두운 동굴로의 도피가 아닌 볕 들고 따뜻한 양지에서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할 돌봄이 필요하다. 이 아저씨들에게도 말해 주고 싶다. 그들이 호소하는 외로움은 비싼 독주로 해결되지 않으며, "집구석에 들어와 봤자 반겨 주는 건 반려동물밖에 없다"고 가족에게 윽박지른들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만화 등 다양한 미디어에서 자주 활용되어 우리에게도 굉장히 친숙한 그리스 로마신화, 그 안에서 모든 신의 으뜸으로 꼽히는 제우스에게도 비극적인 가정사가 있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 크로노스가 자식에게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 제우스의 형제자매를 집어삼킨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크로노스 그 역시 자신의 아버지인 우라노스를 거세한 역사에 기인한다. 결국 제우스는 크로노스에게서 형제자매를 구해 내고 그를 권좌에서 몰아낸다. 대를 물린 이 비극적 신화는 아버지라는 권위를 향한 두려움과 이를 극복하고 마침내 권력을 쟁취해 내는 주인공의 서사로 변주되어 다양한 이야기에 쓰인다.
대표적으로 "내가 니 아비다"로 유명한 영화 '스타워즈'가 그렇다. 이 서사에서 주인공에게 아버지는 갈등과 극복의 대상이다. 간혹 아버지가 존경의 대상, 성장 동력인 경우도 있다. 최근 성공적인 2편으로 각광받았던 영화 '탑건'이 그렇다. 허나 이 영화에도 아버지는 이미 죽어서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주인공에게 부재로 인한 원망과 동경의 대상으로 쓰일 뿐이다. 이 서사가 만들어 내는 극적인 긴장감과 재미에 빠져 있다가도, 자꾸 거세되고 사라지는 아저씨들이 마음에 쓰인다. 그 아저씨(기성세대)가 곧 나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라는 위계질서에서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은 치열하고 고독하다. 기껏 권력을 획득한 이후에도 외로움은 해소되지 않고 언제 대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어느 순간부터 배우 봉태규처럼 육아하는 아버지가, 에릭남 부자처럼 자상하면서도 친구 같은 관계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예능이나 유튜브에서도 무게를 잡으며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낄낄거리며 장난치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웹툰 작가 이말년, 주호민 같은 아저씨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돈 벌어다 주는 기계'로 자조하면서도 쉽사리 놓지 못했던 가부장 권력의 문제를 직감하고 그 고독한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종의 생존 전략이다.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 그것도 처절하게가 아니라 더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남는 것만큼 강력하고 절박한 동기부여가 또 있을까.
아버지들이여, 아저씨들이여 변해야 한다. 변해야 산다. 사랑받는 아저씨가 되고 싶지 않은가? 행복한 아저씨를 꿈꾸는가? 그렇다면 기억하자, 가야 할 길은 페미니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