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체 기술, 피 한 방울로 암세포 찾고 잡아낸다

입력
2022.12.03 11:00
17면

편집자주

국내외 주요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리포트입니다

#. 난임으로 고생하다가, 17년 전 시험관 시술로 아들(고3)을 낳은 A씨. 최근 비슷한 처지로 임신에 성공한 조카를 위로·격려하려고 만났다가 깜짝 놀랐다. 시험관 배아상태에서 유전체 검사를 실시해 건강한 배아만 자궁에 착상시켜 임신성공률을 높인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A씨는 “나이 많은 산모들이 갖는 유산·기형아 출산에 대한 공포가 첨단 유전분석 기법에 의해 크게 낮아지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 중년의 직장인 B씨. 10여 년 전 간암으로 부친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건강검진 때마다 CT촬영 등 관련 검사를 받아왔다. 그런데 이번 검진부터는 ‘혈액 유전체 방식’의 진단검사를 받기로 했다. 조영제를 먹어야 하는 CT촬영 등 복잡한 검사 대신, 소량의 피만 채혈하면 혈액 속 DNA를 통해 각종 암의 존재 여부를 정확히 찾아내는 기술이 개발됐기 때문이다.

위 사례는 실제이거나, 앞으로 곧 닥칠 미래에 관한 것이다. 첫째 사례에서 소개한 ‘배아 선별검사’는 국내 50여 개 난임병원에서 이미 실용화됐다. 난임으로 고생하는 35세 이상 산모들의 임신 성공 가능성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산모의 연령이 높아질수록 함께 높아지는 태아의 염색체 이상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크게 덜어주고 있다.

두 번째 사례는 흔히 ‘리퀴드 바이옵시(Liquid Biopsy)’라고 불리는데, 아직 상용화 수준에는 도달하지 않았지만 미래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이 기법은 CT 촬영 대신 혈액검사만으로 암 DNA를 잡아내는 방식으로, 한 방울 수준의 혈액만으로 다양한 암을 초기 상태에서 찾아내는 게 관련 분야 연구자들의 목표다. 물론 현 상태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 기술로는 조기진단에 필요한 혈액의 양이 200㏄ 이상이나 필요하고 진단의 정확성도 떨어진다. 암이 상당히 진행된 3기나 4기에서는 진단이 정확하지만 1, 2기 초기에는 잡아내기 어렵다. 아직은 유전자를 통한 진단으로 ‘이상 가능성’을 잡아낸다고 해도, 의료현장에서의 확진 판정은 반드시 CT를 찍은 뒤 이뤄지고 있다.

불과 10여 년 전에는 상상하기 어렵던 일이 가능하거나, 실현이 눈앞에 닥친 건 ‘유전체 분석기술'의 발달 때문이다. 유전체 분석기술의 발달 속도는 반도체 기술의 발달 속도와도 비교된다. 한때 반도체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무어의 법칙’, ‘황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었다. ‘무어의 법칙’은 1980~1990년대 반도체 집적회로 성능이 18개월마다 두 배씩 늘어나는 걸 가리켰고, ‘황의 법칙’은 18개월보다 짧은 12개월마다 두 배씩 늘어난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2000년 이후 이뤄진 유전체 분석기술은 ‘무어의 법칙’, ‘황의 법칙’보다 더 빠르고 강하게 발전하고 있다. 유전체 분석의 맹아기(萌芽期)인 2001년 무렵에는 1GB 분량의 염기서열(시퀀싱) 분석에 529만 달러(62억 원)의 비용과 10년의 기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2020년 무렵에는 그 비용(8달러)이 66만분의 1로 감소했고, 소요시간(2일)도 1,825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실제로 유전자 해독 기술의 발전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려면 당장 고등학교 생명과학 참고서부터 다시 작성해야 할 판국이다. 염색체수 이상에 따른 대표적 사례로 제시되는 다운증후군(3개의 21번 염색체 보유)과 관련, 태아상태에서의 판별법으로 융모막과 양수검사 등을 제시하고 있지만 의료현장에서는 NIPT라는 혈액검사가 보편화한 지 오래다. NIPT는 비침습 방식으로 안전하고 간단한 데다 99% 이상의 정확도를 나타내고 있다.

앞으로도 염기서열 분석 속도는 더 큰 가속도로 빨라질 것이다. 현재 상용화된 NGS(Next Generation Sequencing) 방식보다 강력한 신기술의 상용화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일명 롱리드시퀀싱(LRS·Long-read Sequencing)으로 불리는 이 기술은 NGS보다 100배 더 긴 염기조각 단위로 해독하기 때문에 인간 유전자 변이를 더욱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곧 더 빠른 속도, 더 낮은 가격, 더 높은 정확도로 유전체 검사를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유전체 분석 응용분야가 초보적 질병 진단ㆍ치료를 벗어나 광범위한 분야로 확대되고 사전예방 분야에서도 해당 기법이 활용될 것임을 의미한다. 유전체 분석 비용이 10만 원대로 떨어지는 시기를 전후로 해당 검사가 건강검진 항목에 진입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전통적 의료행위에 유전체 분석정보가 본격적으로 응용될 것이라는 일부 전망도 있다.

현재 유전체 분석업계는 암·유전질환에 대한 개인 맞춤형 치료제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암 치료법은 진단을 아무리 잘해도 환자에게 맞는 치료제를 찾아낼 확률이 20, 30%에 그치고 있다. 다양한 치료제를 시험 삼아 돌려쓰게 되는데 그 과정의 고통과 금전적 부담은 모두 환자 몫이다. 그러나 암에 걸리면 췌장, 난소암이든 유전자 돌이변이가 100~1,000개쯤 발생하는 걸 유전체 분석기법을 이용하면 맞춤형 암 백신을 만들 수 있다. 암환자의 혈액에서 다양한 신항원을 뽑아낸 뒤 밖에서 증폭시켜 다시 체내에 주입하는 방식이다. 특정 신항원이 환자의 면역체계를 활성화시키는 게 확인되면 그걸 쓰는 것이다. 바로 이게 3세대 암치료법이다.

유전체 검사를 통해 병을 예방하는 기술도 속도를 내고 있다. 국내에는 2020년 11월 이후 약 70개 유전항목에 대한 조사를 토대로 의뢰인들에게 특정 질병의 높은 발병 가능성을 알려주는 이른바 ‘직접 의뢰 유전자검사 서비스’(DTC)가 실시되고 있다. 특히 국내 DTC 시장은 지난 6년여간 복지부 주도하에 의사단체, 시민단체, 법률단체 등과의 오랜 협의와 준비 그리고 시범사업을 거쳐, 2023년 정식인증제 원년을 앞두고 있다.

DTC 검사 이후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결과지에는 ‘당신은 췌장암 위험이 태어날 때부터 높다. 건강검진에서 췌장 내시경을 꼭 받아라’는 식의 조언이 이뤄진다. 실제로 47세 중년 여성이 최근 해당 검사를 받은 뒤 유방암 고위험군으로 분류돼 정밀검진을 받은 결과, 조기에 암을 발견해 수술로 제거한 사례가 있다.

유전체 기술은 해당 기술의 혜택을 입은 환자와 그 가족에게도 중요하지만, 국가 경제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산업적 측면에서 발전가능성이 무한할 뿐만 아니라, 저출산·고령화로 향후 급증하게 될 노인의료비를 적절하게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먼저 유전체 관련 산업의 미래를 보자. 글로벌 유전체분석 시장은 연평균 20% 이상의 빠른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한국바이오협회 전망에 따르면, 글로벌 임상유전체 시장 규모는 2019년에는 55억 달러(6조 원) 수준이었지만, 2024년에는 135억 달러(20조 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또 LRS와 같은 신기술로 수요가 확대되면 유전체분석 및 관련 장비분야 산업의 전체 규모는 2026년 40조 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유전체 분석기술은 미래 한국 의료체계의 안정적 유지에도 필수적이다. 아무 대책이 없다면, 현재 청년세대가 노인이 되는 2060년에는 노인진료비가 400조 원에 달하게 되지만, 유전체 기술로 암, 당뇨, 혈관 이상 등에 대한 맞춤 대비가 이뤄진다면 의료비 부담이 크게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유전체 기술의 본격적인 상용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혼선이 일부 발생할 수 있으나, 이 기술을 얼마나 빨리 효과적으로 채택하느냐에 따라 국가경쟁력에도 중요한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황태순 한국유전체기업협의회 회장·테라젠바이오 대표

Cisco Systems 등 글로벌 IT 기업에서 20여 년간 Tech Leader 역할을 수행했다. 2014년 이후 바이오 업계로 이동, 테라젠이텍스 바이오연구소 대표를 역임하며 유전체 분야에서 해외 40여 개국 진출 실적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