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의 대규모 감세 조치 발표 일주일 후인 9월 30일. 무디스와 함께 3대 국제 신용평가사(3대 신평사) 중 하나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영국의 국가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신용등급을 내릴 수 있다는 경고였다. 이어 다른 3대 신평사인 피치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결국 영국은 감세 조치를 철회하고, 리즈 트러스 총리는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3대 신평사가 전 세계에서 가장 센 권력을 쥐었다는 26년 전 프리드먼의 진단은 올해 영국을 향한 국가 신용등급 평가에서 다시 확인됐다. 한국에서도 3대 신평사의 위상은 드높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0월 중순 미국 출장 도중 3대 신평사와 일일이 만나 한국 경제의 견조함을 설명했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금융기구와 비슷한 'VIP급 대접'이다.
민간 기업인 3대 신평사가 이처럼 특별 대우를 받는 배경엔 한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국가 신용등급이 있다. 물론 3대 신평사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비판 역시 강해졌다. 이들이 매기는 신용등급이 항상 정답이 아님에도 '성역화'됐기 때문이다. 국제금융시장에서 꼭 필요한 존재이면서, 때로 오답을 내놓기도 하는 신평사의 명암을 살펴봤다.
국가 신용등급 평가는 좁게는 개별 국가가 발행하는 채권, 넓게는 해당 국가의 투자 여건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국가 신용등급이 높을수록 국채를 낮은 금리로 발행해 이자를 덜 주고도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또 투자 안전·선호 국가로 인정받아 해외 자본 유치도 용이해진다. 반대로 3대 신평사에서 박한 평가를 받은 국가는 외화 자금 유출 등 위기에 빠지기 쉽다. 국가 신용등급은 해당 국가 기업 신용등급의 상한선 역할을 하기도 한다.
현재 무디스와 S&P는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투자 등급 10개 구간 가운데 세 번째로 높게 부여하고 있다. 피치는 한 단계 낮은 등급을 매겼지만, 3곳 모두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평가하기 시작한 이후 최고 점수다.
3대 신평사의 신용등급 평가는 국제 금융시장을 굴러가게 하는 핵심 요소로 뿌리내렸다. 무엇보다 100년에 걸쳐 획득한 '명성 권력'으로 얻은 권위가 3대 신평사의 신용등급 평가를 믿고 보게 만드는 힘이다. 특히 한국의 신용등급을 '투자' 등급에서 단번에 '투기' 등급으로 떨어뜨렸던 1990년대 후반 아시아 경제위기 등 세계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등급 강등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임형준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아무리 잘나가는 글로벌 투자자라고 해도 개별 국가 채권이나 회사채를 면밀히 살펴보기 어렵다"며 "3대 신평사의 신용등급 평가는 투자 파수꾼 역할"이라고 말했다.
3대 신평사를 향한 불만도 만만치 않다. 국가·기업의 신용등급을 제대로 매기고, 적절한 시기에 조정했는지가 핵심 비판 대상이다. 이런 불신은 3대 신평사가 초래한 면이 크다. 3대 신평사는 2001년 미국 에너지기업 엔론 사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신뢰를 잃었다. 엔론 회사채와 금융위기의 원인을 제공한 파생상품에 대해 높은 등급을 줘 위기를 사전에 감지하지 못해서다.
S&P가 2011년 8월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최고 수준에서 한 단계 내리고, 2012년 1월 유로존 17개국 중 9개 국가의 등급을 무더기 강등한 조치도 뒷말을 낳았다. 미국 재정적자, 유럽 재정위기에서 비롯된 결정이긴 하나, 해당국은 "평가의 신뢰성과 진정성에 근본적 문제가 있다"고 맞섰다.
결국 2000년대 들어 불거진 3대 신평사의 실책, 미국·유럽 등 강대국의 견제 분위기는 규제로 이어졌다. 미국이 신용평가시장 내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3대 신평사만 인정하던 인가제에서 등록제로 바꾼 게 대표적이다. 다만 일본계 JCL, 중국계 다궁 등 다른 신평사들이 공격적 영업을 하고 있으나 3대 신평사의 아성은 여전히 굳건하다.
관심은 다시 경제 위축기를 맞아 3대 신평사가 특정 국가 신용등급을 내릴지로 향한다. 한국 역시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깔려 있어 경기 하강과 북한 문제가 동시에 터지면 국가 신용등급이 언제든 강등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제권력 신용등급'의 저자인 김병기 전 서울보증보험 사장은 "3대 신평사가 무소불위의 파워를 갖고 있는 건 좋든 싫든 현실"이라며 "이들이 신용등급을 자의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으나 경제 하강 국면에선 특히 신평사 측이 제시하는 평가 기준을 잘 관리할 수밖에 없다"고 조언했다.
임형준 선임연구위원은 "주요국이 골머리를 앓던 3대 신평사 규제는 어느 정도 갖춰졌다”며 "평가를 받는 국가나 기업이 더 똑똑해져서 신평사가 제대로 된 평가를 하도록 규율하는 방식이 정착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