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월드컵 '수난'… 미국에 국기 유린당하고 대표팀 분열까지

입력
2022.11.29 04:30
미국 "시위대 연대 의미"… 이란 "FIFA 윤리위 제소"
카타르 찾은 이란 관중, 정치적 분열로 충돌
대표팀도 견해차…"축구 본업에만 집중하겠다"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이 2022 카타르 월드컵 무대에서 수난을 겪고 있다.

정부의 반정부 시위 유혈 진압으로 이란은 인권 후진국으로 거듭 낙인찍혔다. 국가 위상이 추락한 사이, 미국 축구연맹은 이란 국기에서 '이슬람공화국 문양'을 삭제한 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는 '도발'을 했다. 이란과 미국은 오랜 앙숙이다.

이란 대표팀은 조별 리그 경기에서 국가를 부를지 말지를 두고 오락가락했고, 이란 관중마저 편이 갈렸다. 집안싸움으로 번지자 대표팀은 "축구에만 집중하겠다"고 했다.

이란 국기 변형에…"미국 제소할 것" 강력 항의

27일(현지시간) CNN방송에 따르면 미국 축구연맹은 전날 트위터 등 SNS 공식 계정에 미국과 이란이 속한 카타르 월드컵 B조의 조별 리그 순위표를 올렸다. 순위표의 이슬람 국기는 '이슬람공화국 문양'이 삭제된 상태였다. 미 축구연맹은 "기본권을 위해 싸우는 이란 여성들을 지지하기 위해 국기 모양을 24시간만 바꿔놓으려 했다"고 밝혔다. 실수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란에선 지난 9월 '히잡 의문사'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가 4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시위대를 폭력 진압하면서 450명이 숨지고 1만8,000명 이상이 체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란은 "월드컵에서 미국을 퇴출하라"고 강력 반발했다. 이란축구협회 관계자는 "미국은 이란 국기를 왜곡한 사진을 올림으로써 국제축구연맹(FIFA) 헌장을 어겼다"며 10개 경기 출전 금지를 요구했다. FIFA 윤리위원회 제소도 예고했다. 미국 축구연맹은 편집된 이란 국기 사진을 SNS에서 삭제했다. 미국과 이란은 30일 맞붙는다.

여론·대표팀도 분열…"정치 질문하지 마"

카타르에 원정 응원을 간 이란 축구팬들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대표팀이 고국의 반정부 시위대를 더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니 정부를 지지해야 한다"는 반론이 부딪치면서다. 시위대 지지자들은 응원복과 응원 깃발 등에 시위 구호인 '여성, 삶, 자유'를 써서 세계의 관심을 호소했다. 정부 지지자들은 이들을 비난하며 서방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못하게 말렸다. 그 과정에서 몸싸움까지 벌어졌다고 프랑스24뉴스는 전했다.

이란 선수단은 조별 리그 첫 경기인 21일 잉글랜드전에선 국가를 부르지 않았다. 반정부 시위대에 동참하는 것으로 해석됐지만, 대표팀 내에도 패가 갈려 있다. 에이스인 사르다르 아즈문과 주장 에산 하지사피는 정부를 공개 비판해온 반면, 공격수 바히드 아미리와 미드필더 메흐디 토라비는 정부를 지지한다. 이란 대표팀이 25일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국가를 부른 데엔 이런 사정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반정부 시위 지지자들은 "선수단이 압박에 굴복했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이란 대표팀은 "축구에만 집중하겠다"는 입장을 냈다. 정치적 갈등이 경기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판단에서다. 공격수 메디 타레미는 웨일스와의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시위대에 전할 메시지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곳은 스포츠를 위한 공간이다. '본업'에 집중해야 이곳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답변을 피했다. 정치 관련 질문을 하지 말라고 요구한 카를루스 케이로스 이란 감독은 격분해 "잉글랜드 감독에게 '영국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건 어떠냐"며 기자와 말싸움까지 벌였다.

장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