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축구' 하면 떠오르는 문구들입니다. 북한은 지난 21일 개막한 2022 카타르 월드컵 일정에 맞춰 하루 3경기씩 녹화본을 방영하고 있습니다. △본선 진출이 무산됐고 △경제난과 식량난 등 내부 사정이 열악한 데다 △한국, 미국 등 국제사회와 연일 맞서는 강경 구도 속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어도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그만큼 축구 열기가 여느 나라 못지않습니다.
그런데 정작 최근 수년 사이 국제 축구 무대에서 북한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국가대표팀은 물론, 해외 리그에서 활약하던 선수들까지 한꺼번에 소식이 끊긴 겁니다. 핵·미사일 도발에 따른 대북제재와 코로나19의 영향이 스포츠 분야까지 미친 결과입니다. 북한 당국 입장에선 뼈아픈 대목입니다. 스포츠는 '김정은 정권'이 대내 결속을 위해 공들여온 핵심축이기 때문입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스포츠광'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 위원장 집권 후 미국 프로농구(NBA)에서 '악동'으로 유명세를 치렀던 데니스 로드먼은 북한을 다섯 차례나 찾았습니다. 2014년 개장한 북한 마식령 스키장은 김 위원장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주요사업으로 꼽힙니다.
김 위원장은 농구와 스키 외에 축구에도 지대한 관심을 쏟았습니다. 집권 초기인 2013년부터 평양에 국제축구학교를 짓고 축구 유망주들을 불러모아 '해외파' 선수 양성에 나섰죠. 같은 해 이들 학생 중 일부를 선발해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축구 유학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2019-2020 시즌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A 명문 유벤투스에서 활약하며 '북한 호날두'로 불린 한광성 역시 평양 국제축구학교를 나와 스페인 유학을 갔던 '김정은 키즈'로 알려졌습니다.
각별한 노력이 빛을 본 것일까요. 이듬해인 2014년 북한은 각종 국제 축구대회를 휩쓸었습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16세 이하(U-16) 대표팀 챔피언십 우승 △U-19 챔피언십 준우승 △인천 아시안게임 축구 여자 대표팀 금메달 및 남자 대표팀 은메달이 당시 성과입니다. 이듬해 조선중앙통신은 당시 성과를 이렇게 자화자찬했습니다.
마치 북한 축구의 '황금 시대' 개막을 알리는 선전입니다. 하지만 엘리트 코스를 밟은 북한 '해외파' 선수들은 현재 전멸 위기에 처했습니다. 대표적으로 한광성은 2020년 유벤투스에서 카타르 리그 알두하일 SC로 이적한 뒤 그해 9월 방출됐다고 합니다. 미국의소리(VOA)는 지난해 1월 이탈리아의 북한 스포츠 전문가 마르코 바고치 인터뷰를 통해 "한광성이 새 소속팀을 찾지 못했으며, 코로나19 사태로 북한에도 돌아가지 못했고, 조만간 중국을 통해 귀국할 예정"이라고 전했습니다. 떠돌이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후 그에 대한 소식은 북한과 해외 매체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한광성이 해외리그 활동을 접게 된 가장 큰 배경은 북한의 잇단 핵·미사일 도발에 따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제재입니다. 2017년 채택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2397호는 '북한 당국의 핵 개발 자금 창출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해외 파견 노동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한광성을 비롯한 운동 선수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실제 안보리 전문가패널은 2020년 보고서에서 △알두하일 SC와 계약을 체결한 한광성 △이탈리아 SS 아레초 소속 최성혁 △오스트리아 SKN 장크트 푈텐 소속 박광룡을 송환 대상 북한 노동자로 지목했습니다. 이들이 벌어들인 돈이 김정은 정권의 제재 회피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광성 측은 부인했지만, 2019년 스페인 스포츠 전문지 마르카가 한광성 연봉 중 200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를 북한 당국이 챙긴다는 의혹을 보도한 적도 있었죠. 최성혁 역시 2016년 이탈리아 피오렌티나에 합류했지만, 이후 이탈리아 의회에서 대북제재 위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소속팀이 계약을 포기한 바 있습니다.
북한 국가 대표팀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은 2020년 코로나19 발생 직후 국경을 전면 봉쇄하고 국가비상방역체제를 선포했죠. 강력한 봉쇄 조치는 축구 대회에도 적용됐습니다. 지난해 5월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기권을 선언한 것입니다.
당시 북한은 한국과 같은 H조에 속해 있었습니다. 2020년 1차전 이후 코로나19로 중단됐던 2차 예선은 H조 국가들이 한국에 모여 남은 경기를 치르는 방식으로 재개될 예정이었는데요, 한국 원정 경기를 앞두고 출전을 포기한 것입니다. 북한은 올해 5월 코로나19 감염자 발생을 첫 공식화하기 전까지 '코로나19 청정국가'를 주장해왔죠. 그런 상황에서 다른 곳도 아닌 한국에 가서 남은 경기를 치르기엔 부담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은 AFC 규정에 따라 다음 월드컵 지역예선에도 참가할 수 없게 됐습니다. AFC의 월드컵 1, 2차 지역예선은 아시안컵 예선을 겸해 치러지는데요, 결국 이번 기권으로 북한은 카타르 월드컵은 물론 2023 아시안컵과 2026 월드컵, 2027 아시안컵에 모두 출전할 수 없게 된 셈입니다. 여기에 꾸준히 성적을 내던 여자 대표팀 역시 2022 아시안컵과 2023 월드컵 불참을 통보했습니다.
취임 초부터 축구 발전에 고삐를 당긴 김 위원장은 고심이 깊을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북한에 스포츠는 대외적으로 '정상국가' 이미지를 강화하는 통로가 되는 것은 물론, 내부적으로 주민을 단합시킬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각종 국제 축구무대에서 장기간 북한의 모습을 보기 어려워진 만큼 스포츠에 대한 주민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고 동시에 체제를 선전하는 일석이조의 카드를 저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북한은 최근 조선중앙TV를 통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를 비롯한 유럽 축구리그 경기 주요장면을 방영하면서도 손흥민을 비롯한 한국 선수들의 활약상은 쏙 빼놓고 있습니다. 카타르 월드컵을 녹화 중계하는 과정에서는 관중석에 걸린 태극기를 모자이크 처리하는가 하면, 한국이 속한 H조를 소개하며 한국을 '한개팀'이라고 괴상하게 언급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렇다고 한국이 활약하는 스포츠 무대를 마냥 외면하기도 어렵습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에 스포츠를 제외하면 마땅한 오락거리가 없는 만큼 월드컵을 방영하지 않겠다고 하면 주민 불만이 상당할 수밖에 없다"며 "김 위원장이 축구에 공을 들인 것도 그런 이유가 크다"고 설명했습니다. △대북제재 △코로나19 △자연재해로 '삼중고'를 겪는 상황에서 축구라는 '해방구'마저 틀어막힌 북한 사회는 이전보다 훨씬 답답해 보입니다. 미사일 무력시위와 핵위협에 여념 없는 북한이 언제 다시 지구촌의 스포츠 열기에 합류해 '정상적'으로 다른 국가들과 접촉면을 넓힐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