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중원을 갖춘 팀들과의 경기에 팬들의 걱정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축구는 이름값만으로 하는 건 아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카타르 도하의 알 에글라 트레이닝 센터에서 황인범(26·올림피아코스)이 남긴 말이다. 이 짧은 발언 속에 한국 대표팀의 고민과 의지가 모두 담겨 있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은 페데리코 발베르데, 로드리고 벤탕쿠르(이상 우루과이), 브루누 페르난드스, 베르나르두 실바(이상 포르투갈) 등과 숨막히는 중원 싸움을 펼쳐야 한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대표팀의 색깔을 빌드업 축구로 상정한 이상 반드시 이겨내야만 하는 싸움이기도 하다. 어느덧 대표팀 중원의 핵심으로 성장한 황인범의 어깨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축구는 이름값만으로 하는 건 아니다”라는 황인범의 말속에는 그의 축구 인생이 녹아있다. 2015년 K리그 대전 시티즌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황인범은 베테랑들 사이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플레이로 첫해 15경기에 출전, 4골 1도움을 기록했다. 비록 이듬해 팀은 2부리그로 강등됐지만 세 시즌 동안 13골 12도움을 올리며 ‘대전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프랜차이즈 스타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기에 그는 돌연 군경 구단인 아산 무궁화에 입단 지원서를 냈다. 병역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고 유럽 무대를 누비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결정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도전기가 시작된 셈이다.
2018년 9월 1일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며 조기 전역을 확정한 황인범은 이 대회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6일 뒤인 9월 7일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축구 인생에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듯했다.
그러나 유럽 무대 진출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전역 후 친정팀 대전으로 복귀하자마자 포르투갈 프리메이라리가·독일 분데스리가 등에서 그를 노리고 있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지만, 소문만 무성할 뿐 정식 계약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결국 황인범은 2019년 1월 유럽이 아닌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MLS)의 밴쿠버 화이트캡스 입단을 확정했다. 당시 이적 과정에서 구단의 판단 미스 등 잡음이 나왔지만 황인범은 밴쿠버로 떠나기 전 “먼 훗날 대전으로 돌아오겠다”며 친정팀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비록 이적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대표팀에서 승승장구했다. 2019 아랍에미리트(UAE) 아시안컵과 카타르 월드컵 지역예선에 주전 미드필더로 출전하며 ‘벤투호의 황태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대표팀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2020년 8월 러시아 프리미어리그 루비 카잔으로 이적하며 그토록 원하던 유럽 무대도 밟았다. 데뷔 첫해인 2020~21시즌 20경기에 출전해 4골 4도움을 기록하는 등 ‘루비 카잔 돌풍’의 주역이 됐다.
서서히 유럽 무대에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발생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러시아 프로리그 소속 팀들의 유럽대항전 출전이 금지됐다. 다행히 국제축구연맹(FIFA)이 러시아에서 뛰는 외국인 선수와 지도자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규정을 도입한 끝에 임시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K리그1 FC서울과 단기 임대 계약을 체결했지만, 그는 다시 유럽팀을 찾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우여곡절 끝에 올해 7월 그리스 프로축구 올림피아코스에 둥지를 튼 그는 새 팀에서도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올 시즌 도움 3개를 기록하고 있다. 도전의 연속이었던 자신의 축구 인생처럼 이번 월드컵에서도 한 단계 도약을 꿈꾸고 있다. 그는 “처음 대표팀에 발탁된 이후 4년 동안 많은 성장을 했다. 목표들을 하나씩 이뤄나가는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생겼다”며 "모든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