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가 멈췄다. '사건'이 시작됐다" [세상의 관점]

입력
2022.11.22 14:00
<12> 아니 에르노 '사건'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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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0월, 루앙에서 생리가 시작되기를 일주일 이상 기다렸다."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 '사건'의 사건을 여는 문장입니다. '사건'은 약 60년 전 겪은 '자전적 사건'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고 용기 있게 쓴 자전소설입니다. 신체적으로 임신을 할 수 있는 상태이나 출산을 계획하고 있지 않은 여성이 이 문장을 읽었다면 필경 섬뜩함을 느꼈을 겁니다. 마땅히 때맞춰 찾아와야 할 생리 소식이 별안간 늦어지거나 영영 들려오지 않는 것은, 기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구적 장치가 아니라 실제로 일상을 위협하는 '사건'이기 때문이죠.

생리가 끊긴 후로 대학생인 '나'의 시간은 속절없이 흐릅니다. 소설 속 '나'의 시간은 1963년 프랑스. 인터넷을 이용해 임신 중지 정보를 얻기는커녕, 그것이 불법이었기에 임신 중절을 한 여성과 이를 도운 관련자들이 모조리 금고형이나 벌금형을 받던 시대였습니다. 그 어떤 의사도 혼전 임신을 한 가난한 대학생을 위해, 자신의 면허가 취소될 수 있는 일을 감당하지 않으려 합니다. 필경 태아가 존재하는 데에 절반의 기여를 했을 남자친구는 뒷짐만 지고 있죠.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도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올 리 없고, '나'의 하루는 '어떻게 하면 아이를 떼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찹니다.

11월 8일, '나'는 산부인과를 찾습니다. 출산을 원치 않는다고 하자 의사는 주사를 한 대 맞힙니다. "곧 생리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그것이 '유산 방지제'임을 알게 된 것은 아주 훗날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자궁에 자리 잡은 태아와 헤어지기 위해 온갖 비과학적이고 위험하며 불법인 물리적 행위를 시도합니다. 도서관에서 임신 중지와 관련한 책을 찾아보지만 뾰족한 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당시는 그 단어를 입에 담기도 어려웠으니까요.

벼랑 끝에 몰린 '나'를 도운 건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였던 또 다른 여성. 12월 초,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불법 중절 수술을 하는 파리에 사는 간호조무사의 주소를 얻습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 돈으로 100만 원 상당 수술 비용까지 빌려줍니다. 어느덧 해를 넘겨 1964년 1월 15일. 드디어 '나'는 음지에서 행해지는 수술을 받게 됩니다. 혹시나 불법 행위가 발각될까, 탐침관 삽입술로 끔찍한 고통을 느끼는 중에도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합니다. 그리고 1월 20일, 이 '사건'은 끝끝내 종료됩니다.

"여러 해 동안, 1월 20일에서 21일 밤은 기념일이었다." 에르노는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출산한다는 것은, 학업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혹은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에서 한순간에 하층 계급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의미한다는 것을 말이죠. 그리하여 불법임을 알면서도 끝끝내 임신 중지를 감행합니다.

그의 생생한 자기 고백적 기록을 통해 우리는 명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안전한 임신 중지'야말로, 가난하고 어린 여성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는 것으로부터 보호하는 건강권의 문제라는 점을 말이지요. 이는 2019년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 이후에도 대체 입법 등 이렇다 할 제도적 보완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아마도 이것뿐이리라. 나의 육체와 감각 그리고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 말하자면 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아니 에르노, '사건' 中

'사건'의 말미에서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에르노는 이렇게 밝힙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정확하게 고발함으로써, 스스로의 삶과 생각 자체를 문학적 성취로 승화했습니다. "체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겠다"는 그의 고집 덕분에, 쉬쉬하며 이야기되지 않는, 그러나 대다수 여성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가부장제와 여성 억압의 관습과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지난달 스웨덴 한림원이 그를 수상자로 소개하며 "개인적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구속의 덮개를 벗긴 용기와 해부학적인 예리함"을 높이 평가한 이유입니다.



이혜미 허스펙티브랩장 herstory@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