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가 대(對)유럽 무역장벽을 낮추기 위해 ‘스위스 모델’을 검토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유럽연합(EU)과 ‘세기의 결별’을 한 지 3년여 만이다. 이혼도장(브렉시트)도 찍고 재산분할 협의(브렉시트 합의안)까지 끝냈지만, 경제에 빨간불이 켜지자 놓았던 EU의 손을 다시 잡을 방도를 찾고 있는 셈이다.
21일(현지시간) 가디언 등 외신에 따르면, EU와의 관계 재정립 문제를 두고 영국 사회가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다. 논쟁의 발단은 “영국 정부 고위 인사들이 막후에서 ‘스위스-EU’ 관계를 검토하고 있다”는 일간 더타임스 보도다.
영국은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로 EU와 ‘헤어질 결심’을 공식화했고, 2020년 1월에는 완전한 남이 됐다. 이후 영국과 EU 사이 교역에 관세·규제 국경이 세워지면서 무역 부문에서 적지 않은 마찰이 이어지고 있다. 까다로워진 근로·거주 조건에 유럽 대륙 근로자들이 영국 땅을 떠나면서 곳곳에선 인력 부족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이어진다. 영국 산업계가 이날 리시 수낵 총리를 향해 “EU와의 무역 여건을 개선하라”고 압박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영국 경제에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대안으로 스위스 방식이 거론되고 있다. 스위스 역시 영국처럼 EU 회원국이 아니지만 EU와 약 120개의 별도 양자 협정을 맺고 유럽 단일 시장에 접근하고 있다. 대신 EU에 일정 금액의 분담금을 내고, 이들이 요구하는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있다. 결국 스위스처럼 경제 측면에선 보다 유연한 방식으로 ‘뒷문’을 열어둬야 한다는 주장이 영국 정부 내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 관계자는 더타임스에 “그렇게 (스위스처럼) 하는 것이 영국과 EU에 압도적으로 이익이 되기 때문에 결국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8일 제레미 헌트 재무부 장관이 BBC라디오 인터뷰에서 “앞으로 몇 년간 EU와의 무역 장벽 상당 부분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언급한 점 역시 이날 보도에 힘을 실었다.
브렉시트를 지지해온 보수당 정부는 즉각 “사실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외무부 대변인은 “현 정부는 브렉시트 자유를 통해 성장을 주도하고 경제를 강화하는 기회를 창출하는 데 (정책) 중점을 두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영국 언론은 '뒷문' 설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분위기다. 브렉시트가 경제 악화 주범으로 꼽히는 만큼, EU와의 관계 변화를 결국 추구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다. 가디언은 “영국 경기침체 문제가 커지면서 브렉시트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의제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은 주요 7개국(G7) 중 유일하게 경제성장률이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 나라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예상치 못한 외부 요인도 있었지만, 브렉시트로 영국 경제가 더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분석이다.
최근 마이클 손더스 전 영란은행(BOE) 통화정책위원은 “영국 경제 전체가 브렉시트로 인해 영구히 훼손됐다”고 진단했고, 영국 싱크탱크 재정연구소(IFS)는 “브렉시트로 영국이 훨씬 가난해졌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대(對)EU 영국 수출 규모가 2019년 대비 15% 감소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영국 내에서는 이미 브렉시트 회의론도 거세다. 최근 여론조사업체 유고브 조사 결과 ‘브렉시트는 잘못된 결정’이라고 생각하는 영국 국민 비율이 56%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잘한 결정’이라는 비율은 32%에 그쳤다. 제레미 워너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부편집인은 칼럼에서 “화려한 고립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며 “브렉시트 시계를 돌이킬 수는 없겠지만, 가까운 이웃(EU)과의 조화로운 경제 관계는 이제 바람직한 목표가 아닌 시급한 문제가 됐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