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시 수낵 총리가 운전대를 잡은 영국이 대대적인 긴축을 시작한다. 세금은 더 걷고 공공지출은 확 줄여 2028년까지 확충하겠다는 재원이 550억 파운드(87조7,695조 원)이다. 구멍 난 재정을 메우고, 치솟은 물가를 잡으려면 불가피한 선택이다.
예산안에는 영국 경제는 물론이고 수낵 총리와 집권 보수당의 앞날도 달려 있다. 리즈 트러스 전 총리가 투하한 '감세 폭탄'으로 여실히 드러난 영국 경제 취약성을 해소하겠는 것이 수낵 총리의 집권 명분이었다. 2025년 1월 영국 총선 결과는 수낵 내각의 경제 성적표가 좌우할 것이다.
제러미 헌트 영국 재무부 장관은 17일(현지시간) 하원에 출석해 2028년까지의 중기 정부 예산안을 발표했다. 수낵 총리도 참석했다. 예산안의 큰 줄기는 세금을 걷어 250억 파운드를, 지출을 줄여 300억 파운드를 확보하는 것이다. 트러스 전 총리가 50년 만의 최대 규모인 450억 파운드(71조8,407억 원) 감세안의 후폭풍으로 퇴진했기에, 정책 방향을 180도 바꾸는 것이 수순이었다.
증세 대상은 부자들이다. 에너지 업계 이익에 대한 횡재세율이 현재 25%에서 2028년까지 38%로 늘어난다. 이에 따른 내년 추가 세수는 140억 파운드(22조3,244억 원)로 전망된다. 법인세율도 19%에서 25%로 오른다. 개인 부담도 늘어난다. 소득세 최고세율(45%) 적용 기준은 연 소득 15만 파운드(2억3,913만 원)까지 였는데 연 12만5,000파운드(1억9,968만 원)로 낮추기로 했다.
정부 지출도 전방위적으로 줄인다. 가계에 대한 에너지 비용 지원을 축소하고, 국가 전체 에너지 소비도 2030년까지 15% 감축을 목표로 줄여갈 예정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2%)와 해외 원조(0.5%) 비중은 동결하기로 했다. 헌트 장관은 "물가 안정을 기대한다"고 했다.
취약 계층을 위한 지원책도 내놨다. 연금, 복지 수당 등을 물가 상승률과 연동해 늘리는 한편, 의료와 교육 투자도 강화하기로 했다.
수낵 총리는 자신과 보수당이 이번 예산안과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출 삭감 계획 시점을 상당 부분 총선 이후로 잡아둔 것은 민심의 역풍을 피하기 위해서다. 정부는 경제 위기를 부각하며 정부의 결단임을 강조해 민심을 달랬다. 헌트 장관은 "우리는 '어려운 결정'을 회피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6년여간 총리 4명이 낙마할 정도로 영국의 정치적 불안이 극심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경제 정책을 끌고 갈 동력을 수낵 총리가 확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영국 경제에 대한 대내외적 신뢰도도 높지 않다. 야당인 노동당은 "결국 확인한 건 보수당의 세금 강탈뿐"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