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친구가 이번 주에 심폐소생술(CPR) 교육을 들었다고 연락했다. "누군가를 살리려면 상상보다 힘이 더 많이 들어. 구조되기 전까지 쉴 틈 없이 압박을 해야 해"라면서 "다들 이거 배워서 교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메시지를 단톡방에 남겼다. 10월 29일 참사 당시 거리에 있던 시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구조에 뛰어들어 심폐소생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심한 거였다.
친구는 자기 방식으로 애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애도에는 분노하고 슬퍼하는 뜨거운 면도 있지만 고요하고 차가운 면도 있다. 친구는 일상 공간에서 재난이 또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상기하면서 다만 나의 힘으로 어떻게 더 많은 사람이 죽지 않게 만들지, 만약 이런 일이 다시 생긴다면 어떤 역할을 할지 스스로 고민했다. 실제로 참사 이후 심폐소생술 교육이나 자격증을 신청한 사람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시민이 개인으로서 참사를 애도할 방법을 고민하는 동안 정치가 보여준 모습은 초라했다. 공직자로서 피해자에게 사과와 애도의 마음을 표하고 막을 수 있는 죽음이 아니었는지 원인을 철저히 밝혀서 아쉬운 마음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보다 행사의 주체가 없어서, 매뉴얼이 없어서 막을 수 없었다는 면피성 발언이 앞섰다. 정치인이 재난과 참사 상황에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직함이나 지위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 자리에는 있을지언정 정치의 자리엔 없는 것이다.
참사의 원인을 밝히는 일이 책임자를 색출해서 처벌하는 방향으로 좁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참사를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말도, 사건의 원인을 철저하게 규명해야 한다는 말도 여야 간의 정쟁처럼 들린다. 정치가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공동체를 추스르고, 다시는 이 같은 참사가 발생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과 신뢰를 남겨야 한다면 그 책임은 여야 한쪽에만 있지 않다. '참사를 정치에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원인 규명과 대책 마련을 여야 책임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 정치가 참사를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학자 김명희는 "개인적 진실을 포함한 총체적인 진실의 사회적 해석과 소통은 설명 없는 '치료'를 넘어 설명의 힘이 촉발하는 설명적 '치유'의 가능성을 확대한다"고 했다. 정치는 이번 참사를 한국 사회라는 공동체가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도록 설명할 의무가 있다. 이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누군가 처벌을 받겠지만 전부는 아니다. 시스템이 있었지만 작동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고 공직자가 가져야 할 업무 윤리나 태도에서 점검할 부분은 없는지, 정말로 막을 수 없는 죽음이었는지 다양한 원인을 들여다봐야 한다. 이것이 정치가 피해자를 애도하는 방식이고 공동체가 회복을 기약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방법이다.
피해자를 탓하는 적나라한 댓글에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개인이 서로를 탓하지 않도록 공동체의 공간을 만들어 주는 정치다. 중요한 건 누가 더 많이 책임지느냐가 아니라 다시는 같은 상황에서 사람이 죽지 않는 거다. 이 목표를 잊으면 현실 정치가 자꾸만 초라해진다. 시민들이 정치의 역할을 사회에서 지워낸다. 다음에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약속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포기한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광역버스 입석을 제한하거나 출근길 지하철 포화도를 정비하는 등 일상 안에 있었던 위험 요소에 대한 지적들이 나타나고 있다.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위험이 있을 수 있고, 모두가 안전을 위해서 몸 사리며 일상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어디서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제도와 믿음을 구축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이 신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분명히 정치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