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브라질에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대통령이 재집권하며 남미 좌파 정치의 부활을 알렸다. 극우파 정권 밑에서 세계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던 브라질이 다시 변화의 바람을 탄 것이다. ‘룰라의 귀환’을 국제사회에 실감시켜준 장면이 있었다. 이집트 시나이 반도 휴양지 샤름 엘 셰이크에 그가 16일 나타나자 열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세계 언론에 잡혔다.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7) 참석차 방문한 이곳에서 룰라는 전 정권 시절 파괴된 아마존 열대우림을 복원하고 ‘기후 범죄자’들을 쫓아내겠다고 약속했다.
룰라의 재기를 보여준 샤름 엘 셰이크. 예전에는 기후대응 논의와는 거리가 멀었던 지명이다. 홍해 아카바만 부근에 위치한 인구 7만3,000명의 작은 도시로 이집트인들은 흔히 ‘샤름’이라 줄여 부르는 이곳은 걸프 부자들의 휴양지로 유명하다.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과 달리 편치 않은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1956년 수에즈 위기 때에는 이집트 해군 기지가 있는 이곳에 이스라엘군 낙하산 부대가 내려와 민간인 수백 명을 살해하고 항구를 점령했다. 1년 만에 이집트가 반환받았지만 이후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했고 1967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 때 다시 이스라엘이 점령했다.
1982년에야 영토를 돌려받은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샤름을 ‘평화의 도시’로 공식 선포하고 개발에 나섰다. 1960년대 말까지 어부들이 가끔 들르는 기착지 정도였던 곳에 호텔들이 줄지어 들어서기 시작했다. 관광사이트들은 홍해 산호초를 구경하는 스쿠버다이빙과 사막 사파리, 낙타 트레킹과 패러세일링 같은 여행상품을 홍보한다. 시나이 성지 순례객들의 주된 방문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2005년 이슬람 극단조직의 테러공격으로 88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도 있었다.
국제 뉴스에서는 중요한 회의 개최지나 협상 무대로 자주 등장한다. 1999년 9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집트가 가자지구의 자치를 보장한 협정을 맺은 곳이 이 도시였다. 그러나 이듬해 이스라엘 우파 정치인의 도발로 ‘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봉기)가 일어났다. 이 사태를 해결하려고 다시 샤름에 정상들이 모였다. 2005년에는 중동 정상회의가 열렸고, 2007년에는 다시 아랍권 각료들이 모여 전후 이라크 재건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2006년과 2008년에는 중동 경제포럼이 개최됐다.
샤름에서 열린 회의들은 이 밖에도 많다. 그 배경으로는 이집트가 중동 역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상을 꼽을 수 있다. 걸프 국가들처럼 자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현대 공화국 수립 이후 대부분의 기간을 독재정권하에서 보냈음에도 아랍 세계에서 이집트의 권위는 컸다. 초대 대통령이자 ‘비동맹’의 중심이었던 가말 압둘 나세르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무바라크 시절 이집트는 중동-북아프리카 지정학의 중심에 있는 외교 대국이었다. 콥트교(이집트 기독교) 신자였던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는 유엔 사무총장을 지냈다. 유엔 주재 대사와 외교장관을 역임한 아므르 무사는 2000년대 10년 동안 아랍연맹 사무총장을 맡았다. 1997년부터 2009년까지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이끈 유엔의 핵 감시 책임자 무함마드 엘바라데이도 이집트 출신이었다.
하지만 안에서 썩은 정치를 바깥에서의 화려한 행보로 언제까지나 치장할 수는 없었다. 2011년 ‘아랍의 봄’이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쓸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혁명의 물결이 카이로까지 전파돼 왔고 무바라크 30년 독재정권이 무너졌다. 무바라크가 쫓겨가 피신한 곳은 샤름이었다. 그해 2월 11일 한때 각국 정상들을 불러모았던 바로 그곳에서 무바라크는 사임을 발표했다. 사우디 왕실이 망명을 제안했으나 무바라크는 “샤름에서 죽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혁명은 뜨거웠지만 민주선거로 선출된 무슬림형제단 정부는 국민의 뜻에 반하는 정치를 펼쳤고 이집트의 민주주의는 굴절됐다. 무슬림형제단과 그 지지자들을 학살하고 집권한 군 출신의 압델 파타 엘시시 현 대통령은 2020년 무바라크가 사망하자 ‘국장’으로 치렀다. 무바라크는 잠시 옥에 갇혔다가 고령을 이유로 풀려났고 카이로 병원에서 사망하기 직전까지 샤름에서 평안한 가택연금생활을 했으니, “샤름에서 죽겠다”던 소원을 이룬 셈이다. 반면 이집트인들은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비롯한 모든 정치적 자유를 다시 빼앗겼다.
이집트가 상대적으로 외교 현안에서 떨어져 있던 10년 새 중동-북아프리카 외교의 중심은 카타르나 아랍에미리트연합(UAE) 같은 걸프 국가들로 옮겨갔다. 이 기간 이집트 정부는 무슬림형제단을 제거하고 이슬람주의를 억누르는 데에 국내 정치의 초점을 맞췄다. 대외 정책도 이에 사실상 종속돼, 이전에는 협력보다 경쟁에 가까웠던 사우디와 UAE에 밀착했다. 이란, 카타르, 튀르키예 등 무슬림형제단을 비호하는 국가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우디와 UAE의 돈을 끌어다 쓸 수 있었다는 점도 유인 요인이었다. 그러나 이집트 정부의 주된 관심은 역시나 국내 정세와 경제 문제였다.
2020년부터 이집트가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키프로스, 이스라엘, 그리스와 함께 튀르키예가 중심이 된 동지중해 가스포럼에 이름을 올렸다. 카타르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방송금지가 풀려 다시 기자들을 카이로에 파견했다. 내전 이후 시리아의 안정을 다루기 위해 튀르키예, 이란, 러시아가 중심이 돼 ‘아스타나 프로세스’라 불리는 외교협의체가 구성된 바 있다. 이집트는 당사국인 시리아를 빼면 여기 참여한 유일한 아랍국이었다. ‘아랍 지도자’의 역할을 되찾으려 하는 것으로 풀이됐다. 요르단, 이라크와 함께 ‘아랍 동맹’을 강화하려는 노력도 했다.
지난해 5월 가자지구에서 이-팔 ‘11일 분쟁’이 벌어졌을 때 중재자로 나선 것도 눈에 띄었다. 미국은 수십 년 동안 그래왔듯 이집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엘시시가 집권했을 때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합동군사훈련을 중단하는 등 거리를 두는 척했지만 잠시뿐이었다.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엘시시를 “내 친애하는 독재자”라고 불렀다. 미국 민주당 정권 출범 뒤 이집트와 관계가 나빠질 것이라던 예상과 달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엘시시의 일주일 새 두 차례 통화, 앤서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카이로 공식 방문, 압바스 카멜 이집트 정보국장의 워싱턴 답방 등이 이어졌다. 백악관은 이집트에 국방 원조를 하면서 인권문제 조건을 대거 없애줘 사실상 ‘인권 모라토리엄’을 선물했다. 바이든과 엘시시는 지난 11일 샤름의 ‘토리노 람보르기니 국제컨벤션 센터’에서 만나 양국 국교 100년을 기념하며 “전략적 협력을 늘릴 기회”라고 선언했다.
이집트의 자신감을 부추기는 또 하나의 요인은 에너지 잠재력이다. 경제가 위축돼 있는 동안 이집트는 무바라크 시절부터 계획해 온 에너지 허브 구상을 구체화했다. 2015년 지중해 해상에서 대규모 가스전이 발견된 것은 이집트에는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홍해 연안 사막에 조성한 거대 풍력발전 단지와 태양광 발전 계획을 발판 삼아 키프로스 섬을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에너지 공급망을 만드는 것이 이집트의 목표다. 이집트의 기후조건과 기후전환 시대 주변국들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유럽외교관계위원회(ECFR)는 “이집트가 다시 돌아왔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집트를 포기할 수 없는 워싱턴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놓고 혹자는 ‘대마불사’라는 표현을 썼다. 유럽에도 이집트는 지중해 남쪽의 안정을 위해 협력해야 할 중요한 파트너다. 유럽연합(EU)은 민주적 규범과 인권 같은 핵심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이집트와 관계를 풀 채비를 하고 있다.
샤름에서 열린 COP27은 이집트의 복귀를 알리는 팡파르였다. 6일부터 18일까지 이어진 이 회의를 통해 이집트가 기후외교의 중심에 섰다고 현지 언론 알아흐람 등은 보도했다. 영국 가디언이 전한 풍경은 좀 다르다. 가짜 원형극장과 거대한 공룡 모형이 ‘짝퉁 라스베이거스’를 연상케 하는 도시 한편에서는 ‘무카바라트’라 불리는 정보요원들이 100m 간격으로 줄 서서 독재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샤름은 파리협약이나 교토의정서처럼 기후대응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도시가 될 수 있을까. 이집트인들이 염원하는 자유는 독재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을까. 룰라의 브라질처럼, 이집트도 궤도를 찾아갈 수 있을까.